[허원순 칼럼] '사회적''정치적' 남발되면 진보·발전 없다
한국에서 ‘정치적 해결’은 탈법적 절충을 의미할 때가 많다. 여의도 정치에선 초법적 야합을 종종 그렇게 부른다. 사회 곳곳의 ‘정치적 접근’도 정당한 법절차를 건너뛰자는 말일 때가 잦다. 명문화된 제도적 규범의 무시를 정치적이란 말로 포장하고 합리화한다. 초법적이란 말도 흔하다. 이 역시 법의식 빈곤과 법치·준법에 대한 의지 부족 탓이 크다. ‘정치적’이라는 단어에 통합·소통·사회적 합의 같은 말이 치장처럼 붙을 때 야합, 불법·탈법은 쉽게 정당화된다. 그래서 떼법 정서법이 아직도 먹힌다. 진정한 법치주의로 ‘법의 지배(rule of law)’가 확립되지 않은 탓이 크다. 정치, 곧 국회가 사회 먹이사슬의 정점을 장악한 것도 요인이다.

‘사회적’도 비슷하다. 이 말도 한국 사회 곳곳을 그럴듯하게 파고들며 남발된다. 응용된 사회주의처럼 좌편향 가치와 좌익적 이념을 슬쩍 가릴 때 좌파가 잘 쓰는 일종의 위장막이다. 예산 빼먹기, 공공재원 약탈을 정당화하는 가림막도 된다. 유교 이념 ‘대동사회’와도 비슷하게 연결되니 대중 현혹에 딱 좋다. 그냥 기업이 아니라 사회적기업이 그렇다. ‘사회적 경제’ 토대를 마련하자며 같은 이름으로 5개나 국회에 발의돼 있는 사회적경제기본법안도 마찬가지다. 시행 중인 사회적기업육성법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적기업은 이제 낯설지도,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 성과는 어떤가. 이번 정기국회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부터 실패다. 보조금 나눠 먹기가 횡행했다.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중간지원기관이 전국 광역단체별로 한 개씩 16곳(대전·세종만 통합)이 있는데, 이런 곳 상당수가 ‘정치적’이다. 사업이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될 환경이다. 사회적기업은 창업자금으로도 최대 5000만원까지 지원된다. 대상자 선발부터 사업화까지 고용노동부 소관으로 돼 있지만, 실상은 이래저래 ‘정치적’이다.

‘사회적’이 ‘정치적’과 결합하면 어떻게 되나. 좌파의 해묵은 구호인 공정이나 투명성이라도 담보될까. 성과 내기·경쟁보다 끼리끼리 나눠 먹기로 치닫고, 사업도 시장기반형보다는 관(官)의존형이 되기 십상이다.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319억원이 투입된 사회적기업 육성(창업)사업에서 평가원의 인증을 받은 사례는 전무하다. 2011년 이후로 봐도 2400억원이 투입됐지만 인증률은 10%에 그친다. 일부 종사자의 선거 활동경력 등을 보면 정치적 편향성이 확연하다. 문재인 정부 때 용역·자문·후원 명목으로 몰아준 관급 일감도 뒤늦게 확인되고 있다. 사회적기업 중에는 정부 지원이 끊기면 문 닫을 데가 적지 않을 것이다.

기업뿐 아니라 ‘사회적’을 내세운 곳은 동시에 ‘정치적’인 경우가 많다. 무늬는 기업인데 정당인이 포진했다거나, 성과도 없이 인건비만 집행되는 곳들이다. 생계형 정치꾼이 늘면서 ‘돈벌이로서의 정치’ 생태계가 그만큼 넓어졌다. 노정(勞政) 연대로 그런 생태계는 확대되고 있다. 안 그래도 한국의 노정 연대는 이권 분점과 생계이익 공유형에 가깝다. 성과 내기는 뒷전이니 명분만 잘 내세우면 사회적 운동가 행사는 쉽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장탄식으로 각성했던 ‘시 재정의 관변 기생단체 ATM 전락’이 서울만의 일이겠나. 사회적기업이든 각종 조합이든 관변 경제의 생태계는 꽤 탄탄해졌다.

사회적기업이 비판에서 벗어나려면 시장 기반의 보통 기업보다 오히려 더 엄격·투명해질 필요가 있다. 자립과 성과 내기도 중요하다. 그럴지라도 사회적이란 말 사용은 자제되고 영역 또한 최소화가 바람직하다. 그것이 사회적기업 스스로 고유의 기능을 인정받으며 살아남는 길이다. 그렇게 민간의 자율과 창의성, 시장 활력이 제고돼야 파이가 커지고 경제가 발전한다.

‘사회적’과 ‘정치적’의 과잉을 막고 ‘법적’과 ‘경제적’을 회복·복권해야 한다. 경제적은 효율·혁신·지속가능성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자율·자립은 기본이다. 그래야 그럴듯한 명분이나 구호가 내용과 실제를 가리는 포퓰리즘도 추방된다. 더 중요한 것은 ‘법적’ ‘법대로’다. 기업과 산업, 곧 경제에서 ‘법적으로’는 시장원리에 맞게, 효율성과 혁신을 염두에 두면서, 지속가능성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때로는 냉정해 보여도 진짜 진보와 발전의 원리다. 더 이상의 정치적과 사회적의 남용을 막아야 한다. 경제적과 법적의 복원·확립이 제대로 된 법치를 앞당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