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브리우드 생 줄리엥 성당의 김인중 신부 작품들 ⓒJoel Damase
프랑스 브리우드 생 줄리엥 성당의 김인중 신부 작품들 ⓒJoel Damase
하늘의 빛을 더 찬란하게 땅으로 흩뿌리는 예술, 스테인드 글라스화다. 고대 이집트 왕국에서 로마 초기 교회와 고딕 양식의 건축에 주로 쓰였으니 그 역사만 해도 천년을 훌쩍 넘는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유럽 예술의 시들지 않는 꽃이었다. 중세 시대엔 문맹률이 높았던 탓에 성경 속의 장면들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고, 2000년 전후론 추상의 영역으로 경계가 넓어지며 진화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납선 기법이다. 색을 입혀 구워낸 유리를 자르고 두 장을 결합하는 스테인드글래스는 물감이 번져나가지 않는 정교한 선을 요구했기 때문에 동테이프로 경계를 나누고 그 안에 납을 부어야 했다.

천년 역사의 스테인드글래스 기법에서 ‘납선’을 뜯어낸 최초의 한국인 신부 화가, 유럽 38개국 45곳의 교회 풍경을 바꿔놓고 있는 이가 있다. 김인중 베드로(83)다. 유럽 내에선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와 함께 ‘세계 10대 스테인드글래스 화가’로 꼽히는 그가 14일 서울 명동 카톨릭회관 대강의실에서 ‘빛의 화가, 김인중 신부를 만나다’는 주제로 강단에 섰다.
프랑스 브리우드 생 줄리엥 성당의 김인중 신부 작품들 ⓒJoel Damase
프랑스 브리우드 생 줄리엥 성당의 김인중 신부 작품들 ⓒJoel Damase
김 신부는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 후 스위스 프리부르대와 파리 카톨릭대에서 수학했다. 1974년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수사 화가로 활동했고, 지금도 프랑스 보베 성당 등 다수의 스테인드 글래스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난청 등으로 몸은 조금 불편했지만, 그는 90여 분에 걸쳐 자신의 작품 세계와 생애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옆엔 동생인 건축가 김억중이 함께 했다.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김인중 신부가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화 ⓒ FATHER MICHEL TEHEUX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김인중 신부가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화 ⓒ FATHER MICHEL TEHEUX
그림이 곧 기도였다.

‘영원한 빛’인 신을 찾는 작업을 하면서 어둠에 빛을 내리는 일을 해왔지요.”
그의 그림은 동양적이기도 서양적이기도 하다. 뿌리가 단단한 서양의 스테인드 글래스 작업을 하면서 그는 납선을 없애는 기술을 개발한 동시에 화풍 역시 새롭게 창조했다. 실제 수묵화에 쓰는 붓으로 유화 물감을 일필휘지 긋는가 하면, 원색의 다양한 색채로 마티스와 보나르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1970년대부터 유럽 공방에서 작업해온 '신부 화가' 김인중 ⓒ공식 홈페이지
1970년대부터 유럽 공방에서 작업해온 '신부 화가' 김인중 ⓒ공식 홈페이지
어린 시절 야구 선수와 배우를 꿈꿀 만큼 열정이 넘쳤던 그는 사실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자란 첫째 아들이었다.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소사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서울대 미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났다가 성유리화에 빠져들었다. 그가 수도복을 입고 김포공항으로 돌아왔을 당시 가족들은 “요즘 프랑스 파리 패션이 저런가보다”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그가 사제의 길을 걷는 것에 온 가족은 충격에 빠졌다고 김 신부는 회상했다.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설치된 작품들  ⓒ김인중 신부 공식홈페이지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설치된 작품들 ⓒ김인중 신부 공식홈페이지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설치된 작품들  ⓒ김인중 신부 공식홈페이지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설치된 작품들 ⓒ김인중 신부 공식홈페이지
나의 그림은 동양화도 아니고, 서양화도 아니고 ‘세계화’다.

그 뿌리는 나의 고향과 스승에 있습니다. 부여를 휘감는 백마강의 빛과 동네 샘물에 비치던 반짝이던 햇살, 대학 시절 (그림을 잘 못그리던 나의 데셍을) 알아봐준 장욱진 선생님과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셨던 김철호 선생님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백마강이 나에게 수평의 선이었다면, 우뚝 서있는 ‘은진미륵’ 석상은 수직의 선을 알려준 셈이지요.”
그는 유럽 수도회 공방의 화가로 살며 그는 윌리엄 터너, 클로드 모네, 앙리 마티스, 피에르 보나르 등의 작품도 깊게 탐구했다. 그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뽑아낸 색채와 빛에 매료됐다고. 김인중 신부의 작품이 설치되는 교회는 곧 유럽 전역의 ‘꼭 가봐야 할 명소’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브리우드 생 줄리앵 성당은 작품 설치 후 미쉐린가이드의 최고 평점인 별 3개를 받고 프랑스 관광명소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김인중 신부가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화 ⓒ FATHER MICHEL TEHEUX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김인중 신부가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화 ⓒ FATHER MICHEL TEHEUX
나의 뿌리는 백마강과 마을의 샘물, 그리고 은진미륵

그는 자신의 평생 화업에 대해 그 뿌리가 '고향'에 있다고 반복해 말했다. 고향을 그리워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만약 있다면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였다.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다섯 살 때 해방을 맞았어요. 그대 비행기도 처음 봤고, 해방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동네에 작은 우물가가 있었어요.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물을 길어다 쓰던 평화로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물에 비치던 빛, 사람들을 살게 한 물에 대한 그 근원을 늘 생각했지요. 가끔 한국에 올 때마다 가장 먼저 들르던 곳이 그 우물가입니다. 6.25 때 희생된 사람들, 이제는 거의 사라진 동네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곤 하지요."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유럽으로 떠났던 그는 어느 날 수도회복을 입고 공항에 들어와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도미니코수도회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였다. 뿌리 깊은 유교 집안, 6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를 부모님은 어서 귀국해 결혼하는 날만을 꿈꿔왔던 때였으니, 가족들의 충격은 몹시 컸다.

“몇날이나 몸져 누워있던 어머니가 제 뜻을 받아들이시고, 결국 세례받는 날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에 데려가셨어요. 부처님한테 '안녕히 계세요' 인사는 해야 한다면서요. 그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은진미륵의 우뚝 선 입상이 그에게 수직의 아름다움이었다면, 백마강의 드넓은 강줄기는 수평의 미를 알려준 모태였다.

"지금도 백마강을 보며 생각합니다. 저 강처럼 덧없이 인생이 흘러서, 바다에 가고 하늘까지 가라.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에 닿을 수 있을 때까지 흘러라, 하고요."
1970년대부터 유럽 공방에서 작업해온 '신부 화가' 김인중 ⓒ공식 홈페이지
1970년대부터 유럽 공방에서 작업해온 '신부 화가' 김인중 ⓒ공식 홈페이지
나의 스승 - 장욱진, 남관 선생, 그리고 김철호

고향의 자연과 유산들이 그의 어렴풋한 기억의 뿌리였다면, 잊지 못할 스승도 세 분 있다고 했다. 서울대 미대 시절 장욱진 화백으로부터 석고 데생 수업을 들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동료들보다 실력이 부족해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그의 그림을 보고 과묵했던 장욱진 선생은 "자네는 목탄을 종이에 문지른 재질이 좋다"고 했다.

그 한마디는 김 신부에게 벽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이종상, 유희용과 같은 대단한 동료들 틈에서 저는 하도 못그려서 미술을 포기하려던 때였어요. 잘 그리는 게 꼭 예술은 아니라는 걸 장욱진 선생으로부터 배웠죠. 좋은 예술과 잘 그리는 건 다른 문제라는 걸 알려준 그 작은 칭찬이 지금의 저를 만든 한마디였습니다."

김 신부는 또 "서울에서 존경하던 화가 남관 선생을 프랑스에서 다시 만나 작고 때까지 가족처럼 지냈다"며 "남관 선생님은 신라분이고, 저는 백제 사람이라 서로 다른 파란색을 탐구했다"고 했다. 고교 시절 미술 교사로 왔던 김철호 선생님도 잊을 수 없다고. 당시 야구에 빠져있던 김 신부를 미술의 길로 인도한 은사였다.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윌리엄 터너와 모네, 그리고 보나르

그의 그림이 '세계화'라고 할 수 있는 데는 색채가 있다. 그의 스테인드 글라스화 등 다수의 작품에는 동양적인 선과 여백, 율동감이 살아있다. 유화인데 마치 먹으로 그린 그림과 같은 기본적인 선들이 화면을 채운다. 동시에 아름다운 색이 있다. 원색을 적재적소에 배열해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화면 안에 리듬을 부여한다. 그런 그는 윌리엄 터너와 클로드 모네, 피에르 보나르의 그림을 존경한다고 했다. 세 화가의 공통점을 자연을 관찰하는 특별한 눈과 인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윌리엄 터너는 바다에 자기 몸을 매단 채 그림을 그렸죠. 프랑스 인상파를 낳게 한 원조라고도 할 수 있어요.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고 감명 받아 10m가 넘는 그림을 다락방에서 이어붙여 그린 적도 많았습니다. 모네와 저는 딱 100살 차이가 나는데, 그는 연못에 자신의 영감을 심고 선을 그려냈지요. 리옹대성당에서 계절에 따라 빛을 관찰하기도 했고요."

피에르 보나르는 평생 수도자처럼 살았던 화가다. 몸이 아픈 아내를 평생 그렸다. 모든 색을 주옥처럼 그림으로 표현했다. 보나르의 그림을 통해 인간의 육체에 대한 아름다움을 다시 보게 됐다고.

"보나르의 그림은 편견을 깨주는 그림입니다.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라 하는데, 예수님도 육체가 있어 부활을 하셨으니 얼마나 귀한 것인가요. 보나르의 그림 속엔 원래 생각하던 고정관념을 벗겨주는 힘이 있습니다."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설치된 작품들  ⓒ김인중 신부 공식홈페이지
벨기에 리에쥐 생폴 대성당에 설치된 작품들 ⓒ김인중 신부 공식홈페이지
스테인드 글라스는 교회의 눈

김 신부가 지난 60년간 유럽 교회의 풍경을 바꾼 장면들은 이루 셀 수 없다.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그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변화하고, 그 빛을 감상하기 위해 교회를 찾는 사람들만도 수두룩하다. 국내에선 용인시 신봉동 성당과 대전 카이스트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2021년 카이스트대 산업디자인학과 초빙 석학교수가 된 그는 대전 본원 학술문화관 4층 천장에 ‘빛의 소명’을 영구 설치했다. 지금도 새로운 것들을 실험하고 탐험하며 도자기 작품에 심취한 그는 지난해 고향 근처 청양의 버려진 연초공장을 동생인 김억중 건축가와 함께 ‘빛섬갤러리’로 개관했다.
카이스트 학술문화관에 설치된 김인중 신부의 작품들 ⓒ카이스트미술관
카이스트 학술문화관에 설치된 김인중 신부의 작품들 ⓒ카이스트미술관
그의 창작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국에 오래 체류하게 된 후 한국의 유리공예가들을 만나 함께 도자 작업을 하고 있고, 생활에서 스테인드글라스화를 접할 수 있는 공예품들도 다수 제작했다.

"지금까지 60년간 해온 것은 연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그림으로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는 것, 그게 제 소명이죠. 우울증에 걸린 청년이 교회 안에서 1시간을 울고 갔다는 글, ‘빛을 받아가기 위해’ 이 교회에 온다는 사람들로 충분합니다."

영국 노트르담수녀회의 수녀로 평생 종교와 예술에 헌신했던 미술사가 故웬디 베케트 수녀는 이렇게 썼다.

“마냥 천사가 그림을 그리신다면, 김인중 신부처럼 그렸을 것이다.”


김보라 기자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프랑스에서 60년 넘게 화업을 이어온 신부 화가 김인중의 유화 작품들. ⓒ공식 홈페이지
김인중 신부의 스테인드글래스 작품이 설치된 유럽의 성당들.
김인중 신부의 스테인드글래스 작품이 설치된 유럽의 성당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