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형준 MBC 사장, 방시혁 하이브 의장 /사진=양사 제공
안형준 MBC 사장, 방시혁 하이브 의장 /사진=양사 제공
"아티스트에 대한 존중이 전제돼야 글로벌 레벨의 TV쇼가 나온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지난 30일 안형준 MBC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K-팝의 세계적 위상에 부합하는 콘텐츠는 선진적인 방송 제작 환경이 조성돼야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안 사장은 방 의장의 이 같은 의견에 깊은 공감을 나타내며 아티스트 권익 보호를 우선시한 제작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이로써 하이브와 MBC 간 4년간 지속돼 온 냉전은 종식 국면에 접어들었다. 선진화된 제작 환경을 마련해 K-팝은 물론 K-콘텐츠 전반의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계기 또한 마련하게 됐다.

일각에서는 지난 4년간의 양사 간 힘겨루기를 거대 엔터테인먼트사와 방송사가 벌이는 자존심 싸움의 구도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 본질은 K-팝 생태계의 지속 성장을 위해 아티스트들의 권익을 지켜나가기 위한 투쟁의 역사에 더 가깝다.

대체 4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MBC-하이브, 4년 냉전 막전막후

그룹 방탄소년단 /사진=빅히트뮤직 제공
그룹 방탄소년단 /사진=빅히트뮤직 제공
방탄소년단은 2019년 마지막 날 미국 최대의 새해맞이 라이브 쇼 '딕 클락스 뉴 이어스 로킹 이브(Dick Clark's New Year's Rockin' Eve)'에 출연했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K-팝의 위상을 떨칠 수 있는 이벤트였다.

12월 31일은 MBC가 가장 공을 들이는 연말 프로그램인 가요대제전이 편성된 날이기도 했다. 미국 일정을 위해 출국해야 하는 방탄소년단 입장에서는 참석이 불가능한 행사였다. 일정상의 문제도 있지만 무대 자체의 인지도나 위상만 보더라도 미국 일정을 수행하는 것이 K-팝 산업 전체를 위해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방탄소년단의 출연이 불발되자 하이브는 곧장 보복받았다.

실제 2019년 MBC 가요대제전의 라인업에서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투모로우바이투게더와 같은 해 인수·합병(M&A)을 통해 하이브에 합류한 여자친구를 찾아볼 수 없었다. MBC는 당시 "아티스트의 섭외는 전적으로 연출자의 권리"라며 방송 콘셉트와 맞지 않아 하이브 아티스트들을 출연시키지 않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당시 K-팝 팬들과 엔터 업계 관계자들은 MBC가 방탄소년단 출연이 불발된 데 따른 보복으로 다른 하이브 아티스트들의 출연 또한 금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요대제전 사태 이후 MBC에서는 하이브 아티스트들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요 프로그램 '쇼! 음악중심'은 물론, 그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도 하이브 아티스트는 출연하지 못했다.

하이브는 산하에 레이블 법인을 두고, 이들 레이블이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멀티 레이블 체제로 운영된다. 예컨대 방탄소년단의 소속사 빅히트 뮤직과 세븐틴의 소속사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는 완전히 별개의 회사다. 하지만 MBC의 출연 제한 조치는 레이블을 가리지 않고, 하이브 산하의 모든 아티스트에게 적용됐다.

방송은 신인 데뷔나 신규 앨범 발매를 앞둔 엔터테인먼트사 입장에서는 더없이 소중한 프로모션 채널이다. 하이브 입장에서는 인기 아티스트를 출연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아티스트를 홍보할 기회를 4년 동안이나 박탈당한 것이다.

한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는 "SM엔터테인먼트나 YG엔터테인먼트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사들도 방송사와 각자의 이유로 힘겨루기를 한 적이 있다"면서 "대부분은 엔터테인먼트사들이 한 수 접는 모양새로 상황이 종료됐는데, 방송사와 엔터테인먼트사 간의 역학 구도를 뒤바꾸기는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4년 사이 처지 바뀐 MBC-하이브

(시계 방향)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르세라핌, 엔하이픈, 뉴진스 /사진=하이브 레이블즈 제공
(시계 방향)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르세라핌, 엔하이픈, 뉴진스 /사진=하이브 레이블즈 제공
안형준 MBC 사장은 방시혁 의장과의 만남에서 2019년 발생한 일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의사를 밝혔다. 방 의장 또한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안 사장의 배려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이날 만남은 단순히 두 회사 간 앙금을 풀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기존의 방송 제작 관행이 아티스트와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들의 권익을 얼마나 고려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발전적인 해법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만남의 상당 부분은 방송 제작 현장에 존재했던 불공정한 관행들에 대한 대화로 진행됐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불공정 관행으로는 음악 프로그램 종료 후 제작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아티스트들이 도열해 대기하는 사례가 꼽혔다.

방 의장은 "제작진에게 인사를 한 뒤에야 아티스트들이 퇴근할 수 있는 관행이야말로 아티스트의 권익을 우선시한다면 반드시 사라져야 할 일"이라며 "이런 관행이 사라질 수 있도록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안 사장은 이에 대해 "제작 현장 전반에서 아티스트들의 권익을 해치는 부분이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겠다"고 화답했다.

방송사와 엔터테인먼트사 간의 불공정 관행은 미디어 환경이 방송사 위주로 형성돼 있던 시절의 산물이다. 방송 기회가 아니면 아티스트들을 소위 '띄우기' 어렵던 시절 정착된 관행이라는 의미다. 방송사는 섭외와 제작, 편성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있었다. 아티스트들은 열악한 제작 환경이나 제작진의 '갑질'에도 불구하고 눈치를 봐야만 했다. 이후 '떴다 싶은' 아티스트들이 자사 프로그램 출연에 난색을 표명하는 것을 방송사들은 절대 두고 보지 않았다. 특히나 음악 프로그램은 방송국에게는 전가의 보도나 다름없었다. 음악 프로그램 섭외는 예능 프로그램 섭외와 '끼워팔기'처럼 진행됐다.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시청률이 높은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를 주는 식이었다.

MBC와 하이브가 냉전 중이던 4년 사이 음악 프로그램 제작환경은 급변했다. K-팝은 세계가 열광하는 장르가 됐다. 방송이 아티스트들의 출연에 더 목말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구나 엔터테인먼트사나 아티스트 입장에서는 꼭 TV 프로그램이 아니어도 신곡을 전 세계에 알릴 통로가 많아졌다. '잘 만든' 유튜브 콘텐츠 하나가 몇 지상파 방송보다 신곡 띄우는 효과가 커진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 MBC의 대화 제안에 방 의장이 적극적으로 화답한 것은, K-팝 위상 성장에 비해 뒤처져 있는 그릇된 제작 관행을 개선하고 싶은 의지의 표현으로 분석된다. 실제 방 의장은 MBC 경영진과 환담에서 "K-팝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인 하이브가 주도한다면 방송 제작 환경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한다"며 "방송 제작 방식의 변화가 결과적으로 음악 콘텐츠의 질을 높이게 될 것이고, 콘텐츠의 질을 향상하는 것이 K-팝과 방송 프로그램이 함께 사는 길"이라고 말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는 하이브와 손잡기로 한 MBC의 전향적 결정이 방송계 전반으로 확산할지에 주목하고 있다. 엔터 업계 관계자는 "MBC와 하이브가 4년 냉전의 해결책으로 아티스트 권익 보호를 전격 천명하면서 다른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사들도 예전 같은 출연 강요나 불공정 행위를 일삼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