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소주성 맹신이 부른 통계 조작
2018년 5월 공정거래위원회 출입기자 시절 일이다. 당시 공정위원장이던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인터뷰했다. 장소는 서울 세종대로 한국공정거래조정원 사무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김 전 실장이 컴퓨터 모니터 화면으로 엑셀 파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통계청이 같은 달 발표한 ‘2018년 1분기 가계동향 소득부문 조사’의 마이크로데이터(세부 자료)로 추정됐다. 당시 발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해당 분기에 소득 하위 20%(1분위)의 명목소득은 역대 가장 큰 폭(-8.0%)으로 감소했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 소득 격차 역시 역대 최대(5분위 배율 5.95배)로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 오히려 분배 구조를 악화했다는 비판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었다. 김 전 실장의 반론은 간단했다. 이렇게 한마디로 혼잣말을 했다. “표본 때문이네.” 통계 표본에 저소득층 노인 인구가 늘어 1분위 가계소득이 줄었다는 기획재정부 설명과 궤를 같이했다. ‘소주성은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감사원이 지난달 발표한 ‘주요 국가통계 작성 및 활용실태’ 감사 결과에 따르면 이 같은 ‘소주성 맹신’은 지난 정부의 통계 조작 과정 곳곳에서 집단적으로 드러난다. 문재인 정부 주요 인사들은 ‘소주성이 잘못된 것이냐, 통계 수치가 잘못된 것이냐’는 답이 뻔한 의문에 봉착했을 때 늘 통계 수치를 탓했다.
[토요칼럼] 소주성 맹신이 부른 통계 조작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분기 가계동향 소득부문 조사 결과에 대해 “최저임금 증가의 긍정적 효과가 90%”라고 언급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이 서울대 대학원 후배인 한국노동연구원 소속인 한 연구원으로부터 받은 통계 재가공 보고서를 토대로 한 발언이었다. 최저임금 영향 분석 없이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의 근로소득 증감을 연도별로 단순 비교해 개인 근로소득이 하위 10%를 제외하고 모두 증가했다는 자의적인 결론을 담은 보고서였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가 공식 통계보다 일개 연구원의 개인 분석을 더 신뢰한 것이다.

역시 홍 수석의 대학원 후배인 강신욱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통계를 탓했다. 그는 2018년 1분기 가계동향조사 통계가 나온 직후 청와대에 조사 방식 변경을 건의했다. 몇 달 후 취임 1년여 만에 경질된 황수경 통계청장의 후임으로 전격 발탁됐다. 강 청장은 매달 1000가구씩 새로 뽑아 연간 1만2000가구를 조사하던 방식에서 60대 이상의 비중을 줄인 7200가구를 선정해 이들을 대상으로 매달 조사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 방식이 처음 도입된 2020년 1분기 가계동향 조사에서는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소득 하위 20% 가구 소득이 늘어나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반면 야당은 기존 방식대로였다면 역대 최악의 소득분배 지표가 나왔을 것으로 분석했다.

문 대통령은 재임 시절 “소주성은 세계적으로 족보 있는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소주성은 포스트 케인지언인 폴란드 경제학자 미하우 칼레츠키의 성장 모형인 임금주도성장론의 한국판이다. 하지만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교수 등 주류 경제학자는 “임금주도 성장은 경제학적으로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라고 비판했다. 최저임금을 한 번에 300% 이상 올렸다가 경제 위기를 맞은 베네수엘라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설사 족보를 인정한다 해도 임금주도성장론에는 ‘통계를 조작하라’는 내용은 없다.

지난 정부 인사들은 아직도 소주성 맹신에 사로잡혀 있다. 문 전 대통령은 감사원 감사 결과가 발표된 지 며칠 되지 않아 SNS에 좌파 성향인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문재인 정부 고용노동정책 평가’ 보고서를 공유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 정부에서 비정규직 비율과 임금 격차가 줄고 노동분배율이 대폭 개선됐다는 내용을 담았다. “부동산만큼은 할 말이 없게 됐다”던 문 전 대통령은 소주성에 대해서만은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다.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달 발간한 저서 <부동산과 정치>에서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언급하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성찰 없이는 미래에 반복될지 모를 상황에 올바로 대처할 수 없다”고 했다. 소주성도 마찬가지다. 맹신을 버린 차가운 성찰이 필요하다. ‘소주성이 잘못된 것이냐, 통계 수치가 잘못된 것이냐’는 질문의 답을 수정할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