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하반기 트렌드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 ‘올드머니 룩'이라고 한다. 화려한 로고와 장식적인 디테일을 가미하며 앤데믹의 후련함을 표출했던 2022년 말~2023년 초의 흐름과는 달리, 뉴트럴한 컬러와 절제된 실루엣으로 ‘오래된 부(富)’ 특유의 여유로움을 강조하는 패션을 가리킨다. ‘올드머니 룩'을 살펴보노라면 자연히 ‘클래식'이라는 단어가 따라오고 “클래식은 영원하다"라는 격언도 떠오른다.

음악계의 올드머니 룩, 클래식 음악에서 활동하는 기획자들은 적어도 100년은 건재했던 ‘기본템' 레퍼토리와 동시대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영하고 MZ한(!) 곡들 사이에서 굉장한 내적 갈등을 경험할 것 같다.

기획자로서 베토벤 교향곡 5·9번, 브람스 교향곡 1·4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6번, 드보르작 교향곡 9번 등 누구에게나 친숙하며 어떤 악단이 연주해도 평타는 치는 곡들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프로그램에 넣는 순간 ‘너무 우려버린 사골인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 없다.

뉴트럴 톤의 베이직한 의상들이 자칫 심심하거나 올드(!)해 보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쉬운대로 베토벤 교향곡 4번, 브람스 교향곡 2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드보르작 교향곡 7번, 말러 교향곡 1·5번 정도로 이쪽 저쪽으로 살짝 움직여본다면 또 그것대로 ‘사골인듯 사골 아닌 사골같은 프로그램’ 이라며 고개를 갸웃하는 덕후를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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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아이템과 절제된 컬러에 액세서리, 주얼리 등 적당한 소품을 가미해 ‘올드머니 룩’을 완성하는 것처럼, 무난한 곡들 위주의 콘서트 프로그램에 세련미를 높이는 요소를 가미해본다면 어떨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 ‘알프스 교향곡’,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불새’,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 교향시들이 떠오른다. 곡의 서사에 직관성을 더해 감상이 용이하면서도 풍성한 음악적 효과로 실황 연주의 쾌감을 동시에 선사하는 곡들이다.

작곡가 중심으로 본다면 시벨리우스, 라벨, 무소르그스키 등이 각각 핀란디아, 라 발스, 전람회의 그림 등의 필살기를 갖췄다. 어지간한 교향곡 못지 않게 편성이 크고, 음악의 드라마를 위해 연주의 집중력이 필요한 곡들이기에 덕후와 머글 사이 어딘가에 있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을 공략하기에 적합하다.

뜨겁고 끈적했던 여름이 가고 서서히 바람이 시원함을 머금을 무렵 덕후들은 설레기 시작한다. 전 세계 명문 오케스트라들이 내한하는 시즌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들의 연주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좋은 소재로 만들어진 기본템에 벨트, 신발, 액세서리 등을 가미해 완성한 ‘올드머니 룩'이 떠오른다.

런던 필하모닉은 품질 좋은 베이직 아이템의 깊은 맛으로 승부를 볼 예정이다. 브람스 교향곡 1번과 드보르작 교향곡 7번을 연주한다. 암스테르담 로열콘세트르허바우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이라는 ‘기본템’에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이라는 ‘한끗 차이'를 더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클래식과 트렌드의 절충형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정말 자주 연주돼 ‘예술의전당 BGM’이라도도 불리는 브람스 교향곡 4번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를 곁들이나 했더니 좀더 나아가 베르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개의 작품’도 프로그램에 올렸다.

무려 멘델스존이 카펠마이스터를 맡았던 역사를 보유해 올드머니의 레거시 관점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은 멘델스존, 바그너의 곡들과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이라는 정찬으로 좀더 덕후 쪽에 무게중심을 둔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덕후는 덕후대로 머글은 머글대로 즐길 거리가 풍성한 가을이 다가온다. 비록 통장은 가벼워지겠으나 마음만큼은 황홀한 음악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골’ 프로그램이면 어떠랴. 우려도 우려도 덕후라면 무릇 오래된 음악이 주는 새로움, 그 뭉근하고 깊이있는 매력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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