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의 인생을 나무에 빗댄다. 유년은 묘목 같고, 청년은 벚나무 같고, 중년은 단풍나무 같고, 노년은 백설 맞은 소나무 같고, 한 사람의 죽음은 고목이 사라진 이후의 흔적을 닮았다. 나무의 사계와 인간의 사계가 닮아서인지, 나무가 그리는 풍경은 내 정서의 안쪽에 깊이 스며 있다.

“아끼는 책이야.” 친구가 독립서점에서 발견한 팝업북을 책꽂이에서 꺼내며 말했다. 책을 감싼 투명한 비닐을 조심스럽게 벗기는 그의 모습은 보석상이었다. 면장갑을 끼진 않았지만, 지문이 닿아서 변색이 될까 봐 신중한 목소리였다. 나는 내 손에 때가 묻었을까 봐 물티슈로 손가락을 닦았고, 양손을 비비며 물기를 말린 후 책장을 펼쳤다.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단번에 느꼈다. 이 책을 이야기하는 모든 언어가 박약할 수밖에 없음을.
이미지 출처: one-stroke.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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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무(Little tree)>라는 제목과 고마가타 가츠미(Katsumi Komagata)라는 이름. 표제는 익숙했지만 작가는 낯설었다. 첫 페이지를 펼쳐 보니 백지에 손톱 길이만 한 정사각뿔이 우뚝 솟아 있다. 새싹 혹은 어린나무다. 그 둘레에 프랑스어, 영어, 일본어로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여전히 눈 속에…… 이렇게 작은 존재가 있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유약한 나무가 의젓한 나무가 되어 계절에 따라 세상의 빛을 물들이는 이야기. 발라낸 생선 가시처럼 나뭇가지만 남은 존재가 되었다가, 때가 되면 잎을 맺고 떨구다가 사라지는 이야기. 인간이 아니라 나무가 주인공인 이야기. 그렇게 책은 시간이 흐르면서 크고 늙는 나무의 성장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빛에 따라 나무의 그림자가 달라지는 경험을 겪게 해준다.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노트에 이런 글귀를 적었다. ‘틈이 있어야 빛이 흐를 수 있음을, 저마다 자기 몫의 그늘이 있음을. ’

고마가타는 1953년 일본에서 태어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북 아티스트다. 내가 인터넷을 검색해서 알게 된 그의 이력은 이렇다. 그는 볼로냐 라가치상을 세 번 받았다는 것. 손수 종이를 오리고 이어붙여 <작은 나무>를 만들었다는 것. 그가 만든 책 대부분이 인쇄소에서 몇천 부를 찍어낼 수 없어서 희소하다는 것. 나는 그가 만든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 <접기와 계획(PLIS ET PLANS)> <나뭇잎들(LEAVES)>, <태양이 떠오를 때(When the sun rises)>를 보면서, ‘어떤 책은 그 자체로 조각품이 된다’라는 생각을 했다.

올해 봄이 다가오기 전, 회사를 졸업하는 동료에게 어떤 선물을 할지 고민하다가 <작은 나무>를 건넸다. ‘달려왔으니 쉬어가도 좋지. 유치처럼 돋아나는 싹, 폭죽처럼 터지는 꽃들을 바라보면 말이야. 우리네 인생도 낙하와 상승의 연속이란 생각이 들어’ 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이미지 출처: one-stroke.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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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창밖의 목련나무를 보며 적은 글귀가 떠오른다. “목련은 수의 같구나. 피고 지는 건 찰나구나. 인간의 목숨이라고 별반 다를까. 붙잡아야 할 때와 놓아주어야 할 때를 아는 인간은 처량하지 않다. 적정한 간격을 두고 홀로 있어야 할 때와 일정한 무리를 이루고 살아야 할 때를 아는 인간은 외롭지 않다. 나무의 종류만큼 인간의 면면은 다양하고, 나무의 생처럼 인간의 생도 흘러간단 사실을 아는 인간은 조급하지 않다. 근데 말이다. 나무(木)와 나무(木)가 모이면 숲(林)을 이루는데, 인간(人)과 인간(人) 모이면 법석거리며 쌍시옷(ㅆ)을 내뱉은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