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서 불혹에 등단·환갑 다돼 영화감독으로
19년 전 '고래'로 해외 문학상 후보에…흡입력 있는 전개에 유머·풍자
'부커상' 아쉽지만…천명관, 한국적 서사로 해외서 통한 이야기꾼
천명관(59) 작가의 '고래'가 23일(현지시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시상식에서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최종후보 6편에 오르는 성과를 내며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가 세계 문학계에서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줬다.

한국 작품이 이 부문 최종 후보까지 오른 것은 지난해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에 이어 2년 연속이자 통산 네 번째였다.

앞서 2016년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으며 2018년 그의 다른 소설 '흰'이 최종후보에 올랐다.

'고래'는 영화계에 몸담던 천명관이 2004년 불혹에 펴낸 첫 장편 소설이다.

지난 19년간 그의 존재를 증명해줬던 이 소설은 이번엔 그의 이름을 해외 문학계에 알리는 발판이 됐다.

'부커상' 아쉽지만…천명관, 한국적 서사로 해외서 통한 이야기꾼
◇ 영화계와 문학계 넘나든 이야기꾼
1964년 경기도 용인 출신인 천명관은 20대에는 영업 사원 등으로 평범한 직장 생활을 했다.

우연히 군대 동기가 일하던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 사무실을 찾았다가 영화계에 관심을 두고 30대에 충무로 영화사에 취직했다.

천명관은 이곳에서 제작부 일을 하며 틈틈이 글을 썼지만 창작 관련 일을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시나리오를 본 한 프로듀서가 "당장 그만두고 시나리오를 쓰라"고 조언하면서 본격적인 집필에 나섰다.

그는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을 각색하고 '총잡이'(1995), '북경반점'(1999), '이웃집 남자'(2010) 등의 각본을 썼다.

이후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던 그는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자 문학도였던 동생의 권유로 소설에 도전했다.

어린 시절부터 영미문학을 중심으로 책을 두루 섭렵했지만, 당시 그는 한국 문단의 경향조차 알지 못했다.

문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계 흐름에 발맞추는 데도 자신이 없었던 그는 내키는 대로 써보기로 했다.

석 달 만에 쓴 단편 소설 '프랭크와 나'가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당선되며 문단에 발을 들였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소설가 타이틀을 단 천명관은 다음 작품을 고민하던 중 거구의 여자 벽돌공 이미지를 떠올렸다.

거대한 육체와 인간의 외로움은 당시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소재였다.

본능적으로 상상력이 뻗어나가는 대로 첫 챕터를 썼고 이후 받아쓰기를 하듯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렇게 태어난 장편 '고래'는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았다.

이후 그는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2007)와 '칠면조와 함께 달리는 육체노동자'(2014), 장편소설 '고령화 가족'(2010), '나의 삼촌 부르스 리'(2012),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2016)를 잇달아 펴냈다.

지난해에는 동료 작가인 김언수의 소설 '뜨거운 피'를 원작으로 한 동명 영화로 '늦깎이' 감독 데뷔를 했다.

2019년 촬영을 마쳤지만 코로나19로 개봉이 늦춰져 영화계에 발을 들인 지 약 30년 만에 꿈을 이뤘다.

시나리오 작업을 이어가던 천명관은 부커상 후보로 다시 회자한 데 대해 "소설가가 될 거란 것도, '고래' 같은 작품을 쓸 거란 생각도 못 했다"며 자신이 멀리 달아날 때마다 '고래'가 삶을 이끌어줬다고 했다.

'부커상' 아쉽지만…천명관, 한국적 서사로 해외서 통한 이야기꾼
◇ 기구한 여성 서사 통해 인간의 욕망과 꿈 해부
'고래'는 출간 당시 10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오랜 시간 입소문을 탄 스테디셀러다.

설화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민담 같은 문체와 토속적인 표현이 가득 차 지극히 한국적인 서사로 통했다.

그러나 세 여성 금복, 춘희, 노파의 기구한 삶에 투영된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과 비천한 현실 너머에 대한 갈망은 해외 독자들에게도 다가갔다.

인물 간의 배신, 살인, 방화, 간음, 폭력과 같은 거침없는 스토리텔링과 작가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와 능청스러운 풍자도 흡입력을 더했다.

천명관은 시상식이 끝난 뒤 연합뉴스와 만나 부커상 후보에 오른 것은 '고래'의 보편성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이야기는 산골 소녀 금복의 영욕과 성쇠가 중심이다.

금복은 여러 남자를 거치며 벽돌공장과 고래극장을 거느린 소도시 기업가로 성공하지만 결국 파멸에 이른다.

박색이라 소박을 맞은 복수심으로 돈에 집착하는 노파, 고래극장 방화범으로 몰려 수감됐다가 벽돌공장에 돌아온 거구의 춘희 등 기구한 인물들이 금복의 삶과 연결된다.

여성 서사이지만 '고래' 속 여성들은 성적 또는 자본주의적인 욕망의 '주체'이면서, 남성의 성폭력과 편견의 피해자이자 객체로 그려지기도 한다.

천명관은 최근 주영한국문화원 북토크에서 "배경이 전근대적이고 원시 상태에 가깝고 마치 국가도 법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세상이란 걸 고려해야 한다"며 "특별히 여성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냥 세상은 이렇게 폭력적이라고 본다"고 했다.

대하소설인 양 스케일이 큰 서사는 기존 작법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전개된다.

'그것이 ~의 법칙이었다'며 판소리체 해설이 불쑥 등장하는 등 문체의 개성도 뚜렷하다.

현실과 비현실을 뒤섞고 환상성을 띤다는 점에서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으로도 평가받았다.

김지영 번역가가 '고래' 번역에 앞서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

500여쪽 분량에 점철된 자극적이고 야만적인 색채를 희석하는 것도 동화 같은 판타지 요소다.

금복에게 원초적 감동을 안기는 거대한 생명체 대왕고래나 말을 못 하는 춘희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교감하는 코끼리 '점보'를 등장시킨 대목이 대표적이다.

제목 '고래'는 욕망으로 얼룩진 현실 너머의 무언가를 꿈꾸는 인간의 숭고함을 상징한다.

문학평론가 조형래는 '고래'의 독특한 스타일에 대해 "역설과 혼합의 산물"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 소설을 해설한 글 '달변과 무언'에서 "'고래'는 서구 근대 장편소설이 제시한 리얼리즘과 그럴듯함의 형식과 기율에 상당 부분 부합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동서양 고금의 다양한 서사 텍스트의 스타일에 빚진 바가 많은, 역설과 혼합의 산물"이라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