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최혁 기자
사진=최혁 기자
지난 3일 오전 11시 서울 명동예술극장 앞. 평일 오전인데도 극장 입구는 외국인 관광객과 직장인 수십 명으로 북적였다.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에 설치된 거대한 캐릭터 벌룬 ‘미응이’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이다.

미응이는 롯데백화점이 지난달 28일부터 명동 상권 활성화를 위해 열고 있는 ‘명동 페스티벌’의 마스코트다. 명동 첫 글자에 들어가는 ‘ㅁ’과 ‘ㅇ’을 따서 만들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롯데 영플라자 방향으로 그려진 200m 길이의 바닥화도 미응이가 주인공이다.

이 캐릭터와 바닥화를 만든 건 그래픽아티스트 그라플렉스(41·사진)다. 나이키 몽블랑 뱅앤올룹슨 BMW미니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는 유명 작가다.

지금은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됐지만, 18년 전만 해도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작품이 설치된 명동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당시 한 게임회사의 배경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몇 년 일하다 보니 ‘회사에서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고 했다.

돌파구가 된 건 저녁마다 혼자 그린 그라피티와 만화였다. 그는 “내 그림을 우연히 접하게 된 의류브랜드 사쿤의 경영진이 지인을 통해 컬래버레이션을 제안했다”며 “직접 디자인한 그라피티 기반의 사쿤 후드가 억대 매출을 찍으면서 ‘내 그림이 사랑받을 수 있겠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고 했다. 이후 힙합 레이블 아메바컬쳐, YG 등과 일하며 본격적인 아티스트의 길을 걸었다.

그라플렉스의 작품은 회화, 조각, 설치, 아트토이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재미있다는 것. ‘ㅇ’ 모양이 위아래로 합쳐진 그의 ‘시그니처 캐릭터’가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짓고, 미키마우스 포켓몬스터 등 친숙한 캐릭터를 두꺼운 선으로 단순화해서 그리는 등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 미소를 선사한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진지한 내용을 농담처럼 얘기하는 선생님들 있잖아요. 저는 그런 스타일이 좋았습니다. 제 작품도 그렇게 다가가고 싶었죠. 때로는 ‘상업예술과 고급예술의 경계를 허문다’는 진중한 메시지를 던질 때도 있지만, 결코 이를 무겁게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나가면서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하거든요.”

이번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그라플렉스는 대형 바닥화와 명동 거리 곳곳에 미응이뿐 아니라 길거리에서 파는 중국 간식 탕후루, 명동성당 등 명동의 특징을 단순화한 그림을 숨겨놨다. 사람들이 그라플렉스의 작품을 찾으며 자연스럽게 명동을 둘러보고, ‘돌아다니는 재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반응은 뜨겁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그라플렉스의 작품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면서 인근 상권도 특수를 누리고 있다”며 “예술을 통해 상권을 살리게 된 것”이라고 했다.

명동 곳곳에 있는 미응이와 바닥화는 오는 7일까지 볼 수 있다. 명동 페스티벌이 끝나면 철거된다. “바닥화는 곧 사라지지만 제 작품이 앞으로도 사람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조그마한 피규어 하나라도 책상이나 침대 곁에 놓고 지칠 때 한 번 보고 웃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