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 물감시장 60년간 형형색색 물들인 '개척자'
‘색깔 있는 여자.’ 미술용 물감 사업에 일생을 바친 남궁요숙 전 알파색채 대표를 유족과 미술계 관계자들은 이같이 돌아봤다. 세계 여섯 번째로 아크릴물감 제조에 성공하는 등 한국 미술 재료의 산 역사로 평가받는 남궁 전 대표가 지난 1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장례는 한국예총장으로 치러진다.

남궁 전 대표는 1962년 남편인 고(故) 전영탁 알파색채 회장과 미술재료 전문회사 알파색채를 설립했다. 성경에서 ‘시초’를 뜻하는 사명의 ‘알파’와 같이 다양한 미술 재료를 최초로 국산화해 미술계의 저변을 넓히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다. 고인은 2000년 국내 최초로 전문가용 수채화 물감 48색을 개발한 공로로 제1회 문구의 날 중소기업청장 표창을 받았다.

1929년 경기 용인에서 태어난 남궁 전 대표는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를 졸업하고 양정여중, 매향여중 가정과 교사로 일하다 전 회장과 결혼했다. 이후 서울 원효로에 약방을 개업하며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약방 사업으로 번 돈으로 1960년대 당시 국내에선 불모지와 다름없던 물감 제조업을 시작했다. 값싸고 품질 좋은 국산 물감을 학생들이 원 없이 써보도록 돕겠다는 각오였다. 한·일 국교 수립 이전이던 당시 밀수되던 일본 물감의 가격은 국산 제품의 10배를 웃돌았다.

남궁 전 대표는 회사에서 영업과 마케팅을 담당했다. 종로 화방 관계자들과 미대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남편과 함께 개발한 물감의 우수성을 알렸다. 사업 초기에는 경리 업무부터 홍보, 판매, 포장 디자인 업무까지 도맡았다.

알파색채는 1969년 국내 최초의 포스터칼라 ‘알파700’을 개발했다. 700번이나 실험을 되풀이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어 1981년 세계 여섯 번째로 아크릴물감(제품명 아크릭칼라)을 개발했고, 1985년 국내 최초로 마커펜을 내놓는 등 제품마다 ‘국내 최초’란 수식어가 붙었다. 특히 아크릭칼라는 물에 잘 지워지는 수채화와 건조가 느린 유화의 단점을 보완한 혁신적인 물감이다.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세계평화의문에 그려진 사신도의 채색에 쓰이기도 했다. 이 사신도는 35년째인 오늘까지 변색과 퇴색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남궁 전 대표는 2012년 전 회장이 93세를 일기로 타계한 뒤로도 현역 최고경영자로 활동했다. 법제처 국민법제관, 서울상공회의소 종로구상공회 부회장 등도 지냈다. 알파색채는 작년 5월 열린 회사 창립 60주년 행사에서 장남 전창림 회장과 차남 전규림 대표 경영 체제로 알파색채의 ‘제2 창업’을 선포했다. 전 대표는 “고인의 유지인 ‘세계의 명화를 우리의 물감으로’란 모토를 이어나가겠다”고 전했다.

유족으론 2남2녀(전창림 회장·전양숙 전 이사·전규림 대표·전선영 이사)와 사위 박규순 전 국민대 자연과학대학장·김재영 씨(미국 연방 공무원) 등이 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