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기업’. 1668년 문을 연 글로벌 제약·소재 기업 독일 머크(Merck KGaA)에 붙는 수식어다. 자그마한 동네 약국에서 시작한 머크는 올해로 창립 354년을 맞았다. 수차례의 전쟁과 경제 위기, 급격한 기술 진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머크 가문은 무려 13대째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한 나라도 갖기 어려운 ‘354년 역사’의 비결은 뭘까.
"머크, 354년 장수 비결은 회복 탄력성…작은 시장 변화도 감지해 기회 낚아채"

“사업 기회 포착 DNA 탁월”

"머크, 354년 장수 비결은 회복 탄력성…작은 시장 변화도 감지해 기회 낚아채"
벨렌 가리호 머크 최고경영자(CEO·62·사진)는 독일 다름슈타트 집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만나 “머크는 아주 작은 트렌드 변화(microtrend)도 알아채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며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변화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기회를 낚아채지 않았다면 지금의 머크는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5월 머크 CEO에 오른 그가 한국 언론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리호 CEO는 머크 가문 사람이 아니다. 스페인 태생의 의사 출신 전문경영인이다. 대규모 투자와 굵직한 인수합병(M&A)은 머크 가문과 논의하지만 회사 경영 전반은 가리호 CEO의 몫이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다. 머크 가문의 구성원이 아닌 그가 머크에서 12년 가까이 일하며 깨달은 ‘354년 기업의 비결’은 바로 회복 탄력성이다. 위기가 찾아와도 회사 경영이 이내 정상궤도에 들어올 수 있는 힘이 장수 기업의 비결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산업 변화의 흐름 속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는 DNA가 머크의 회복 탄력성을 강화시킨다”고 했다. 머크가 거대한 변화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바이오산업이 급성장할 무렵 조(兆) 단위 M&A를 통해 머크는 첨단 바이오 솔루션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스위스 최대 생명공학 기업인 세로노(14조원·2006년) 인수를 비롯해 바이오의약품 개발에 필요한 각종 시약과 장비, 데이터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는 미국 밀리포어(7조원·2010년), 시그마 알드리치(18조원·2015년)를 연이어 사들였다. 글로벌 데이터센터 신축 붐이 반도체 수요 증가로 이어질 것이란 판단에 반도체용 가스·전구체 생산업체인 버슘 머티리얼즈(8조원·2019년)를 인수했다.

M&A로 사업 영역을 문어발처럼 확대하지는 않는다. 몸집을 불리기보다 정리할 사업은 정리하며 내실 있는 성장을 추구한다. 시장 경쟁이 치열한 일반의약품과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사업을 접은 게 대표적이다. 가리호 CEO는 “우리는 효율적 성장을 추구한다”며 “기존 사업을 발전시키는 게 우선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손을 떼는 것도 옵션”이라고 했다.

‘멀티 인더스트리’ 전략으로 위험 분산

머크는 쉬지 않고 사업재편을 지속했고 지금은 헬스케어(바이오 신약 개발), 라이프사이언스(바이오 소부장), 일렉트로닉스(반도체·디스플레이 소부장) 등 3대 사업부문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모태가 된 전통 제약·화학 기술 역량을 기반으로 유망한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한 결과다. 이 같은 ‘멀티 인더스트리’ 전략은 머크가 회사의 영속성을 높이는 핵심 전략 가운데 하나다.

가리호 CEO는 “‘멀티 인더스트리’ 사업 모델은 회복 탄력성에 대한 머크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고 했다. 사업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경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한 사업이 부침을 겪어도 다른 사업이 이를 보완한다. 그는 “팬데믹과 전쟁이라는 어려운 경영 환경에 처해 있지만 우리는 매우 유망한 사업 분야에 진출해 위험을 분산할 수 있다”고 했다.

머크는 사업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업 부문별 핵심 사업으로 구성된 ‘빅3(프로세스 솔루션·라이프사이언스 서비스, 혁신 신약, 반도체 솔루션)’에서 2025년까지 회사 매출 성장의 절반 이상을 이끌어낼 계획이다. 이를 통해 3년 후엔 매출 250억유로를 달성하는 게 목표다. 지난해 매출(197억유로)보다 26.9% 많은 규모다.

변화무쌍한 사업 포트폴리오 전략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과학기술 기반의 혁신 추구라는 대원칙이다. 가리호 CEO는 “회사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 와중에도 그 중심에는 늘 과학기술 중심 경영이라는 원칙이 있다”며 “머크의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은 바로 기술 혁신”이라고 했다.

“머크家와 유기적 협력…가족 기업 장점 극대화”

지배구조도 회사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다. 머크 지분은 오너 일가가 소유한 E.머크가 70.3%를 보유해 확고한 오너십을 보여준다. 나머지는 기관투자가 등 시장에 풀렸다. 과거엔 머크 가문이 지분 100%를 소유했는데 1990년대 말 투자 확대를 위해 외부 투자가를 받아들인 결과다.

머크 가문과 투자가는 때론 협력하고, 견제하며 머크의 지속 가능성을 지탱한다. 가리호 CEO는 “머크의 지분 구조는 오너 경영과 전문 경영의 장점을 모두 살릴 수 있다”며 “머크 가문의 장기적 안목과 이익 추구 중심인 투자가 관점의 결합은 머크만의 특별함”이라고 했다.

전통적인 가족 기업을 이끄는 전문경영인으로서 가리호 CEO의 목표도 명확하다. 가족 기업이 역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는 “오너 일가가 회사를 더 좋은 모습으로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 리더로 남고 싶다”고 했다.

다름슈타트(독일)=한재영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