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신항에 접안 돼 있는 대형 컨테이너선들의 모습. 연합뉴스
부산신항에 접안 돼 있는 대형 컨테이너선들의 모습. 연합뉴스
국내 최대 교역항인 부산항과 미국 서안 주요 항만인 타코마항 사이에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시범 프로젝트인 ‘녹색해운항로(Green Shipping Corridors)’가 깔린다. 궁극적으로 항로에 투입되는 선박 전체를 메탄올·암모니아·수소 등 저·무탄소 선박으로 전환하고 벙커링(연료공급)등 인프라도 새로 구축하는 사업이다. 6일부터 18일까지 이집트에서 열리고 있는 제27회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서 양국 정부가 최종 합의에 성공하면서 로스앤젤레스(LA)-상하이, 싱가포르-로테르담에 이어 세계 3번째 녹색항로가 만들어졌다.

녹색항로는 탄소중립 이행을 위해 세계 각국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이상’에서 시작됐지만 이면에선 조선·해운을 넘어 에너지 산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패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녹색항로 프로젝트를 통해 차세대 연료가 무엇이 될지, 그에 맞춰 기술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가 담긴 ‘글로벌 표준’이 결정될 것이란 계산에서다. 정부는 소위 ‘녹색항로 전쟁’에 한국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녹색항로 패권 두고 美·英 경쟁

15일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정부는 오는 12월부터 한·미 녹색항로 구축을 위한 타당성 조사(Feasibility Study)에 착수한다. 한국은 해수부 주도로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가, 미국은 국무부와 에너지부가 참여한다. 한·미 정부는 부산항과 타코마항을 비롯해 양국 주요 항만 사이의 녹색항로 실현 가능성 및 방안을 연구할 계획이다. 내년께 연구가 마무리되는대로 실제 녹색항로 구현을 위한 투자 및 정책 추진에 나설 예정이다.

녹색항로 전쟁은 세계 최대 화주국인 미국과 선박금융 강국인 영국의 양자 대결 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영국은 지난해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회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탈탄소해운항로 구축을 중심으로 한 ‘클라이드뱅크 선언’을 발표했다. 이번에 한국이 참여하기로 한 것은 클라이드뱅크 선언 이후 미국이 자국 주도로 추진하고 나선 그린쉬핑챌린지(Green Shipping Challenge)로, COP27에서 공식 발표된 프로젝트다.

두 프로젝트는 지구의 온도 상승을 섭씨 1.5도로 억제하기 위해 해운 부문의 탄소중립을 촉진하기 위한 범국가적 캠페인이란 점에서 같다. 현재 친환경 선박 연료의 대세를 이루곤 있지만 탄소 감축량이 기존 선박용 중유의 15% 수준인 액화천연가스(LNG)를 넘어서는 무탄소 연료를 개발하고, 이를 활용한 선박과 항만·물류 인프라를 구축하는 걸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도 근간은 유사하다. 그린쉬핑챌린지를 주도하는 미국도 클라이드뱅크 선언에 참여 중이란 점에서 두 프로젝트는 서로 연결돼있다.

하지만 두 프로젝트의 차이는 이행 시기다. 클라이드뱅크 선언은 4년 뒤인 2026년까지 6개의 녹색항로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린쉬핑챌린지는 녹색항로 구축 목표 시점이 향후 10년 이내로 보다 여유가 있다. 한국은 지난해 COP26에서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당시 유럽 주요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등 19개국이 참여한 클라이드뱅크 선언엔 동참하지 않았다. 제조업 비중이 높고 조선업과 해운업 규모가 큰 한국으로선 클라이드뱅크 선언이 제시한 2026년에 탄소 감축 계획을 맞추는 것은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에서다.

미국이 시점만 다른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유럽이 제시하는 급격한 탄소 감축 계획엔 참여하기 주저하는 한국 같은 나라들을 규합해 차세대 연료 및 기술 표준을 선점하기 위해서란 것이 정부 담당자들의 분석이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미국은 아마존, 월마트 등 초대형 화주가 즐비한 화주국, 영국은 전통의 선박 금융 강국이지만 정작 조선·해운업 규모는 작은 국가”라며 “녹색 항로 경쟁의 이면엔 탄소중립 시대 에너지 패권을 잡기 위한 보이지 않는 경쟁이 내포돼있다”고 말했다.

○규제 풀어 무탄소 기술 상용화 촉진

이미 녹색항로 전쟁은 글로벌 해운사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세계 최대 해운사인 덴마크 머스크는 현재까지 총 19대에 달하는 메탄올 추진 컨테이너선을 발주했다. 이와 함께 핵심 항로를 중심으로 메탄올 생산 기지와 벙커링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이들 사업의 완료 목표 시점은 2025년이다. 클라이드뱅크 선언이 목표로 하는 2026년에 맞춘 행보다. 머스크가 치고 나가자 세계 3위 해운사인 프랑스의 CMA CGM도 12척의 메탄올 추진 컨테이너선대 구축에 나섰다.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가 구축 중인 메탄올 추진 초대형 컨테이너선대의 모습. 머스크 홈페이지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가 구축 중인 메탄올 추진 초대형 컨테이너선대의 모습. 머스크 홈페이지
차세대 연료 가운데 유일하게 상용화가 이뤄진 메탄올은 기존 선박연료 대비 황산화물은 99%, 질소산화물은 80%, 탄소는 최대 25%까지 줄일 수 있다. 암모니아나 수소는 이론적으로 탄소 배출량이 제로(0)인 무탄소 연료지만 상용화까진 최소 10~20년이 남았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그린항로가 본격적으로 발효되기 시작하는 2026년엔 메탄올 선대를 구축하지 않은 선사는 녹색항로에서 사실상 퇴출될 수 있다.

정부는 녹색항로를 포함한 해양 환경 규제가 향후 해운 산업 내 새로운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라 보고 있다. 규제가 ‘무기’가 된 상황에서 정부는 메탄올·암모니아·수소 등 차세대 연료 추진 및 저장·운송 기술과 자율운항 등 첨단 기술을 선점하고 친환경 선대로의 전환이 이뤄져야만 한국 조선·해운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에 따라 해양수산부는 지난 9일 특례 규정을 마련해 친환경 선박·자율운항 등 신기술의 시험운항 절차를 면제하거나 완화하고, 현재 네 단계로 구성된 설비·기자재 인증 절차를 1단계로 간소화해 기술 개발부터 상용화까지 1년 안에 가능하도록 하는 규제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해운 환경 규제를 결정하는 국제해사기구(IMO)와 협업해 미래연료 사업화 방안을 마련하고 공공·민간 선박 528척을 순차적으로 친환경 선박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추진 중이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