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기업인 국감 증인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노태문 삼성전자 사장(스마트폰 총괄)은 자신의 업무와 상관없는 엉뚱한 질문 세례를 받았다. 의원들은 “미국이 반도체 영업 핵심 기술을 요구하고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등과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노 사장이 “담당을 안 해 모른다”고 하자, 일부 의원은 “그것도 모르냐”고 면박했다. 7시간 넘게 대기하다가 10분가량 진행된 질의 때 벌어진 일이다.

국감 증인으로 나온 기업인들은 질문이라도 받으면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종일 대기만 하다 가는 기업인도 많다. 2017년 국감에선 자정까지 기다리다 지친 한 기업인 증인이 “집에 가도 되느냐”고 위원장에게 묻기도 했다. 그는 새벽 1시20분쯤 국감이 끝난 뒤 나갈 수 있었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는 지난해 정무위와 산업위, 과방위에 겹치기 소환돼 처음으로 한 국감에 세 번 나온 기업 총수가 됐다. 과방위는 김 창업자와 함께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를 불러놓고 정작 상임위원장 등 당시 여당(더불어민주당) 의원 일부는 누리호 발사 현장에 참석한다며 국감에 나오지도 않았다.

마구잡이식 증인 채택과 호통·망신주기가 관행처럼 되면서 기업인들은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가슴을 졸인다. 훈계받고 망신당하는 장면이 TV로 생중계될 수 있어서다. 매년 10월 해외 출장을 잡는 심정도 이해할 만하다. 기업인 못지않게 ‘국감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다. 대관 담당 임원이다. 총수나 최고경영자(CEO)가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국회에 살다시피 한다. 국감 뒤엔 바로 인사철이어서 스트레스는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어제 “기업인에 대한 무분별한 망신주기나 여론몰이를 위한 증인 채택은 최대한 방지해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다음달 4일 시작되는 국감을 앞두고 여야 가릴 것 없이 이미 많은 기업인을 증인 후보로 선정했다. 산업위에서는 여야가 4대 그룹 총수 등 160여 명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국토교통위는 96명을 증인·참고인 명단에 올렸다. 국감에 소환된 기업인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일부 의원이 이를 민원 해결의 기회로 악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확정 기업인 증인 명단을 일부러 흘리는 의원실도 있다고 하니 그런 의구심이 들 만하다. 올해 국감은 ‘기업인 감사’로 변질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건호 논설위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