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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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장마다. 딱 한 팔을 벌린 만큼의 지름, 언제든 펼쳐 들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만의 지붕이 되어주는 그것. 우산의 계절이다.

우산은 누가 최초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기원전 1200년 이집트에선 우산이 천상의 여신 누트를 상징했다. 오직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선 우산을 나약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남성들은 비 오는 날엔 우산 대신 모자를 쓰거나 마차를 탔다. 당당하게 비를 맞기도 했다. 반대로 여성에게 우산은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화려한 액세서리였다. 방수 천과 우산 살로 이뤄진 박쥐 형태의 현대식 우산은 영국 신사 조너스 핸웨이가 발명했다. 러시아와 극동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던 그는 1750년부터 30년 동안이나 해가 쨍쨍한 날에도 우산을 갖고 다녔다. 놀림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의 꿋꿋한 패션 감각은 이후 영국 신사들에게 인정받았다. 우산은 영국에서 ‘핸웨이즈’로 불리며 19세기부터 신사들의 필수 아이템이 됐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우산은?

비가 오면 너를 보니 설레…마그리트 그림 속 160만원 '로열우산'
비가 유독 많이 내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우산 브랜드는 ‘펄튼’이다. 펄튼은 저렴한 것은 10만원 이하 제품도 있어 초고가 브랜드라고 칭하긴 어렵다. 하지만 펄튼은 그야말로 ‘로열 우산’이다.

1956년 영국 아널드 펄튼에 의해 설립된 펄튼의 우산은 157가지 표준 품질테스트를 거쳐 영국 왕실로부터 왕실조달허가증을 받았다. 실제 찰스 왕세자,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 등이 펄튼의 우산을 사용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펄튼의 제품 중 특히 유명한 것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자주 사용한 ‘버드 케이지(birdcage·사진)’다. 버드 케이지라는 이름은 돔 모양의 새장과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우산을 어깨 가까이 내려 쓰면 비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얼굴과 어깨를 지킬 수 있다. 명품관에서 가죽제품을 구매하면 더스트백에 물건을 담아서 주듯, 펄튼 우산을 구매하면 천가방에 우산을 담아준다.

버드 케이지 우산의 특징 중 하나는 우산을 내려 쓰더라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를 막는 부분이 투명 폴리염화비닐(PVC)로 만들어져 우산 너머로 앞을 볼 수 있다. 이 중에는 하단에만 색이 들어가 있는 제품들이 있는데, 본인이 즐겨 입는 옷과 우산의 색을 맞추는 것도 장마철 스타일링 노하우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옷 색깔과 우산 색깔을 맞춰 다양한 버드 케이지 우산을 사용하곤 하다.

르네 마그리트 그림 속 그 우산! 세상에 단 하나

비가 오면 너를 보니 설레…마그리트 그림 속 160만원 '로열우산'
영국 여왕이 사용하는 ‘버드 케이지’는 왕실 우산이라고는 하지만 금액으로 치면 비교적 덜 부담스러운 편에 속한다. 천 대신 PVC를 사용해 원재료값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급 원단과 나무, 스틸을 사용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1854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말리아 프란체스코는 수작업으로 우산을 만든다. 손잡이는 플라스틱이 아니라 나무나 가죽을, 비를 막는 부분도 PVC가 아니라 두꺼운 고급 원단을 쓴다. 결제와 동시에 물건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문하면 우산이 제작되기까지 40~60일의 시간이 걸린다. 이 브랜드 제품 중 가장 비싼 우산은 160만원에 달한다. 손잡이로 쓰이는 나무는 체리나무, 단풍나무, 히코리나무 등 다양하다. 우산대의 나무 재질과 두께는 소비자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야말로 ‘나만을 위한 단 하나의 우산’이 탄생하는 셈이다. 말리아 프란체스코라는 우산 브랜드명은 익숙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우산이 등장한 명화를 보면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온다. 르네 마그리트의 ‘헤겔의 바캉스’(1958) 속 우산이 바로 말리아 프란체스코다. 비틀스도 활동 당시 이 우산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돈 줘도 못산다…4만 개 한정 제작하는 ‘파소티’

파소티 우산은 손잡이의 화려한 보석으로 특히 유명하다. 화려한 디자인 때문에 제품을 우산 겸 양산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파소티는 어네스타 파소티가 이탈리아 만토바에서 1956년 설립한 수제 명품 우산 브랜드다. 파소티 제품 역시 주문제작으로 만들어지며, 소비자가 안쪽과 바깥 원단, 손잡이 등을 선택할 수 있다. 주문제작 후 수령까지는 약 두 달이 걸린다.

파소티 제품을 받아보면 명품관에서 고가의 가죽 제품을 받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제품에는 시리얼 넘버와 구매날짜가 기재된 보증서가 함께 담긴다. 검수가 완료됐다는 의미의 검수표 봉투도 함께 제공한다.

파소티 우산은 연간 4만 개만 수작업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높다. 아랍 왕실은 귀빈에게 답례품으로 파소티 우산을 선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백화점은 2020년 파소티 한국 수입사와 납품계약을 체결하고, 자사 VIP 고객에게 파소티 우산을 선물하기도 했다.

파소티 우산은 국내 미디어 콘텐츠 속 소품으로도 많이 사용됐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는 ‘서예지 우산’으로, ‘부부의 세계’에서는 ‘김희애 우산’으로 입소문을 탔다.

이미경 기자 capit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