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용재 오닐, 지용이 함께 연주한 '난 당신을 원해요'. MBC 유튜브 채널

문득문득 첫사랑이 생각날 때가 있으신가요. 누구나 가슴 한 켠에 첫사랑에 대한 강렬하고 애틋한 추억을 묻어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잊고 지내기도 하고, 때로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잘 생각나지 않죠. 바쁜 일상 속에서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낭만이 사치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고 품고 살며, 아름다운 선율에 담아낸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 에릭 사티(1866~1925)입니다.

사티의 뮤즈는 화가 수잔 발라동(1865~1938)입니다. 발라동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는 분들도, 한 번쯤은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르누아르, 드가, 로트레크 등 당대 파리 주요 화가들의 모델이기도 했으니까요. 르누아르의 '부지발의 춤'이란 작품에도 발라동이 춤을 추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발라동은 파리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로 신비한 매력으로 많은 예술가들을 사로잡았고, 사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르누아르의 '부지발의 춤', 1883, 보스턴 미술관
르누아르의 '부지발의 춤', 1883, 보스턴 미술관
사티가 발라동과 교제한 건 31살, 젋은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단 6개월 뿐이었죠. 하지만 발라동이 떠난 후에도, 사티는 발라동만을 마음에 품고 그리워했습니다. 사티의 인생에 발라동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죠.

그 마음은 사티의 대표작인 '난 당신을 원해요'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곡은 사티가 앙리 파코리의 시에 선율을 붙여 성악곡으로 만들었는데요. 요즘엔 바이올린, 플루트 등을 중심으로 편곡돼 자주 연주되고 있습니다. 각종 광고 등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죠. 원래 성악곡에 담겼던 가사는 이렇습니다. "영원히 서로 얽혀 같은 불길 속에서 불태워져. 사랑의 꿈속에서 우린 영혼을 나눌 거에요."

6개월 동안의 사랑과 추억으로 평생을 살았던 사티. 어떻게 보면 특이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사티의 사랑과 음악, 나아가 인생 모두가 독특했습니다. 천재적이면서도 기이했던 '파리의 낭만 아웃사이더', 사티의 삶 속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사티는 시대를 앞서간 음악가로 꼽힙니다. 오늘날 그의 음악을 들으면 정말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느껴지죠. 하지만 사티는 어릴 때부터 열등생 취급을 받았습니다.

독특한 성격의 영향이 컸는데요. 사티의 어머니는 6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머지않아 재혼을 했는데, 사티는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삼촌에게로 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삼촌의 성격이 괴팍하고 폐쇄적이었고, 사티도 삼촌의 영향을 일부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에릭 사티
에릭 사티
주로 혼자 다녔던 사티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성당에 자주 갔습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오르간 연주자로부터 음악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13살엔 파리음악원에 들어갔지만, 2년 반 만에 음악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음악원에서 가장 게으른 학생' '무가치한 연주를 하는 학생'이라는 혹평을 받았죠. 심지어 19살에 다시 음악원에 입학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나와야 했습니다. 일정한 규칙에 얽매이길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영혼 탓에 천재가 열등생으로 낙인찍혀 버린 거죠.

하지만 창의성은 틀에 박힌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 꽃을 피우는 법입니다. 사티는 21살부터 생계를 위해 '검은 고양이'라는 뜻의 '르샤 누아'라는 카바레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했습니다. 당시 카바레는 오늘날처럼 댄스홀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선술집으로, 예술가들이 모여 시를 낭송하고 연극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좋은 음악도 빠지지 않았죠.

사티가 일했던 곳에도 파리의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는데요. 피카소, 콕토, 디아길레프 등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사티도 자연스럽게 이들과 교류하게 됐고, 아이디어를 주고받았습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짐노페디'도 카바레에서 일하던 22살에 탄생한 겁니다. 정확히는 '세 개의 짐노페디'로, 그중 1번이 가장 유명합니다. '난 당신을 원해'처럼 많은 광고에도 활용되고 있죠.

사티의 음악은 단순하면서도 간결합니다. 구조를 쌓아올리거나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오직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죠.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고 독창적인 선율이 인상적입니다.

사티는 처음 르샤 누아에 갔을 때부터 자신을 ‘짐노페디스트’라고 소개했다고 합니다. 짐노페디는 고대 스파르타에서 젊은이들이 무기를 던지고 나체로 자유롭게 추던 춤을 의미합니다. 햇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 춤으로 아폴론 신에게 경배를 드리며 환희와 고통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죠. 짐노페디는 사티의 영혼과도 정말 닮은 것 같습니다.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가 연주한 '짐노페디' 1번. 부니아티쉬빌리 유튜브 채널

그의 일상 속 모습은 정말 독특했습니다. 사티는 비가 내려도 종종 우산을 쓰지 않았습니다. 우산을 들고 있어도 우산이 젖을까봐 비를 맞았던 겁니다. 또 12벌의 회색 벨벳 양복을 마련한 후, 언제나 그 옷만을 입었다고 합니다. 한 벌이 다 해어져서 못 입게 되면, 다음 양복을 입는 식이었죠. 그래서 그중 절반인 6벌은 끝내 입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던 여인 발라동과 결별 후 했던 행동들도 많은 화제가 됐습니다. 사티는 발라동이 떠난 후엔 어느 누구도 집에 들이지 않고 홀로 머물렀습니다. 그의 사후에야 친구들이 집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곳엔 발라동을 그리워하며 그린 그림과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다수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그를 괴짜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티는 한 번 진심으로 마음을 준 사람 또는 사물과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 의리를 지켰던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티의 아름다운 음악은 때론 사랑, 또 다른 말로는 의리라고 할 수 있는 낭만의 결정체가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