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O를 위한 백서(white paper)에는 비즈니스와 기술의 두 영역이 마치 야누스의 문처럼 서로 앞뒤로 붙어있는데, ‘이러이러한 기술로 이러이러한 비즈니스를 하겠다’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서사의 형식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크게 2가지 요소들을 검증하게 된다. 첫째로는 이 비즈니스가 이익 실현 가능성이 있는 비즈니스인지를 살펴보고, 둘째로는 실제로 그 비즈니스를 구현해낼 기술이 있는지에 대해 판단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다시 여러 가지 검증과정으로 세분되기는 하지만 대략 큰 얼개는 이와 같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기업들의 백서를 보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설명해놓은 수많은 백서에는, 8할 이상이 비즈니스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다가 정작 기술의 부분에 가서는 일반인들도 이해할만한 블록체인의 일반적인 기술의 정의로 끝을 맺는다.
현대의 과학 기술로 제로백이 2초대인 자동차를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자동차 회사들, 엔지니어들이 제로백 2초대의 자동차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 게다가 ICO를 통해 자금을 모으려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비즈니스를 구현해내기 위한 기술력에 대해 명확하게 증명할 의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기술들을 구현해내겠다는 아주 기본적인 설명조차 없이, 현재 가능한 기술들의 조합만을 늘어놓고서 이러이러한 것들이 블록체인 기술로 가능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비즈니스 또한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기다. 블록체인 영역의 기술 발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작 구현해낼 수 있는 기술이 무엇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정작 블록체인 기술이 없어 그것을 구현해내지 못한다면, 그 기업을 블록체인 기술 기업이라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라면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후 자본과 인력의 투자를 통해 훌륭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나갈 기회가 그나마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이다. 훌륭한 요리사가 있으나 매장을 낼 자본이 없거나 어떻게 장사를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투자해 차근차근히 성장을 시켜나갈 수는 있겠지만, 투자를 해주면 세계 최고의 요리사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 힘들다.
Coinopsy와 Dead Coins같은 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까지 ICO를 진행 후 화폐 개발에 실패한 기업이 100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많은 사람이 야누스의 문 앞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비즈니스의 얼굴만 보고 문을 선택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문의 뒤편에는 기술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얼굴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