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가는 사람보다 뒤에 오는 사람이 두렵다. 앞서 가는 사람은 깃발이다.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고, 희망도 된다. 뒤에 오는 사람은 그림자다. 발뒤꿈치에 붙어다니다 어느 순간 치고나온다. 앞선 자와의 거리는 쉽게 가늠된다. 가늠되면 좁힐 묘안도 생긴다. 뒤에 오는 자와의 거리는 가늠이 어렵다. 그러니 인간은 수시로 뒤를 돌아본다. 가늠되지 않으면 불안한 게 인간이다. 그 불안이 때로는 걸음을 재촉한다.

“뒤에 난 사람이 두렵다(後生可畏). 나중에 올 사람이 어찌 지금 사람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이 40이나 50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리 두려워할 게 못된다.” 《논어》자한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후생(後生)은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외(畏)는 단순히 두려운 게 아니라 존경의 뜻을 내포한다. 경외(敬畏)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그러니 후생가외는 뒤에 오는 자의 뛰어남을 두려워하고 시기만 하는 게 아니다. 두렵지만 존중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뒤에 난 사람을 경계해 스스로 더 정진하는 것이다. 후생가외는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는 우리 속담과 함의가 같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35년을 뛰어넘은 망년지우(忘年之友)다. 서원으로 찾아온 이이가 돌아간 뒤 이황은 제자 조목에게 편지를 보냈다. “율곡이 찾아왔다네. 사람됨이 명랑하고 시원스러울 뿐 아니라 견문도 넓고 우리 쪽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배가 두렵다(後生可畏)’고 한 공자의 말씀이 참으로 옳지 않은가.” 율곡의 학문보다 퇴계의 그릇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릇이 큰 데는 다 까닭이 있다.
후생가외보다 귀에 더 익은 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다. 맹자의 성선설에 맞서 순자는 성악설을 주창했다. 둘은 유가이면서 생각의 색깔은 다소 달랐다. 《순자》권학편은 선(善)의 회복에 배움이 왜 중요한지를 상세히 적고 있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더 차갑다.”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청출어람의 출처가 된 구절이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으로 해야 ‘쪽빛보다 더 푸르다(靑於藍)’는 뜻이 되지만 흔히 청출어람으로 줄여 쓴다.

인생은 미지수(未知數)다. 크고 작은 미지수가 삶을 설레게도, 두렵게도 한다. 내일이라는 미지수, 10년 뒤라는 미지수, 희망이라는 미지수, 절망이라는 미지수가 어지러이 뒤엉켜 있다. 삶은 움직이고, 죽음은 한 곳에 머문다. 움직이는 건 수시로 자리가 바뀐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오늘 왼쪽이 내일은 오른쪽이 되고, 오늘 앞자리가 내일은 뒷자리가 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 앞서 가고 누군가에 뒤져 걷는다. 세상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당신이 당신 걸음으로 걸어도 따라오던 누군가의 걸음이 잽싸면 순식간에 당신을 앞지른다. 당신도 독하게 마음먹으면 앞사람을 제칠 수 있다. 어찌보면 세상은 크고 작은 위치 다툼이다. 진짜 뛰어난 자는 나대지 않는다. 진짜 높은 자는 고개를 치켜들지 않는다. 스스로에 취하면 걸음이 느려진다. 겸손한 자는 한발 두발 앞으로 내딛는다. 쉬지 않고 걸으면 하루 백 리도 간다. 아무리 걸음이 빨라도 걷지 않으면 느릿느릿 걷는 자에게마저 뒤지는 게 세상 이치다.

신동열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바람난 고사성어] (9)후생가외(後生可畏)-뒤에 오는 사람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