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집값·출산·격차 최악
'청년착취' 체제 더 견고해져
지옥 외치던 세력에만 '천국'
自立DNA는 '국가의존' 변질
헬조선 넘어 '脫조선' 해야
오형규 논설실장
구글트렌드가 잘 보여준다. 헬조선 언급량이 최고조였던 2015년 9월이 100이면 올 1월은 10, 2월은 3에 불과하다. 90% 이상 줄었다는 얘기다. 뉴스빅데이터 ‘빅카인즈’의 기사 꼭지수도 2016년 2803건에서 지난해엔 225건에 그쳤다. 역시 10분의 1도 안 된다.
헬조선에 대해선 진보좌파 인사들이 두루 정의를 내려놨다. ‘청년 착취 체제’(조국),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은 국가’(유시민). 장하성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도 그즈음 출간됐다. ‘지옥에 가까울 정도로 전혀 희망 없는 사회’라는 프레임은 강력했다. 끝내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귀착한 이유 중 하나다.
헬조선 비난이 사그라들었으면 대한민국은 지옥(hell)이 아니라 천국(heaven)이 된 건가. 그간 헬조선 담론이 크게 보면 저성장 고착화에 기인한 점에서 성장률이 더 추락한 지금은 어떻게 봐야 하나. 현 정부 4년간 켜켜이 쌓인 정책 실패는 이루 헤아리기도 힘들다. 지난해 일자리 100만 개 감소, ‘그냥 쉬는’ 백수 176만 명 등 고용 참사와 ‘이생집망(이번 생에 집 사긴 망했다)’이 된 서울 아파트값 78% 폭등(경실련 조사), 세계 최저인 출산율 0.84명 등 숫자가 말해준다. 소득은 물론 자산 격차도 ‘넘사벽’이다. 법치와 상식은 형해화돼 이젠 옳고 그름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조국 전 장관이 끝장내야 한다던 헬조선이란 ‘청년착취 체제’는 되레 더 견고해졌다. 코로나 위기 속에 콘크리트처럼 경직된 고용구조가 사회 약자들을 더욱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10% 남짓한 귀족노조가 기득권을 키워가는 뒤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취준생들이 “불합격할 기회조차 없다”고 눈물짓는다.
그런데도 헬조선 비난이 사라진 이유는 뭘까. 헬조선 담론의 주된 생산자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시절’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땀 흘려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않고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고, 되레 지위와 권력까지 누린다. 시민·노동단체 출신들은 청와대나 국회로 직행하고, 속칭 ‘민주건달’들은 공공기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거나 하다못해 정부 위원회(574개)와 전국 지자체 위원회(2만6395개) 위원직이라도 꿰찬다.
결국 헬조선 비난의 대부분은 청년 절망에 편승해 정권교체를 노린 정치공세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그 덕에 집권해 약자를 위한다는 정부가 약자를 더 괴롭힌다. 이런 역설에도 멀쩡한 비결은 나랏돈을 쌈짓돈처럼 푸는 절묘한 신공에 있다. 그 결과 자조(自助)·자립(自立)의 한국인 DNA를 ‘국가의존형(型)’으로 개조하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선거 연승으로 자신감까지 붙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 깊이 공감한 헬조선의 ‘세대 착취’ 현실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공정과 정의는 특권층 내로남불의 가림막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던 투표는 기득권을 온존시키는 헛수고이며, ‘국민 눈높이’에 맞춘다던 국민연금은 죽도록 내다가 받지도 못할 강제 세금으로 MZ세대에게 다가온다. 집단세력화와 거리가 먼 이들은 변변한 저항도 못한 채 자포자기 ‘코로나 세대’가 돼간다.
“2030은 세계화돼 있고 그런 잠재력이 플랫폼이란 공간에 모이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주역이다. 이들이 얼마나 빠르고 탄탄하게 ‘현재’가 될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시재 원장 시절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백번 옳고 공감한다. 하지만 정치·사회·노동분야의 586 기득권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다. 세계 어디서든 역량을 한껏 발휘할 디지털 세대가 일자리조차 못 잡는 것이야말로 헬조선이 아닐까.
어느덧 젊은이들이 ‘기회는 박탈되고, 과정은 음습하며, 결과는 맘대로’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런 게 실정과 수탈로 점철된 조선시대의 적폐 아니던가. 지금 절실한 건 헬조선을 넘어 ‘출(出)조선’, ‘탈(脫)조선’이다.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