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축구 한류' 원조 차범근 유럽 진출 40년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의 손흥민(27)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발렌시아의 이강인(18)이 지난달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와 FIFA U-20 월드컵에서 차례로 눈부신 활약을 펼쳐 축구 팬들은 물론 온 국민을 열광케 했다.
이제 우리도 메시와 호날두에 필적할 만한 초특급 선수를 지녔다는 자부심과 함께 몇 년 뒤에는 이들이 국가대표팀을 세계 정상급으로 올려놓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손흥민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전통의 강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박지성(38)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으나 득점을 비롯한 각종 기록과 큰 경기에서의 골 결정력 등을 따지면 무게 추는 손흥민으로 기운다.
그러나 아직도 손흥민이 뛰어넘기 어려운 벽이 있다.
40년 전인 1979년 7월 16일, 독일 분데스리가의 명문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차범근(66)이다.
손흥민은 2016∼2017시즌에 시즌 21골을 넣어 이미 차범근의 유럽 리그 한국인 단일 시즌 최다골(19골) 기록을 경신했고, 유럽 리그 개인 통산 116골로 다음 시즌에는 차범근의 121골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UEFA컵 2회와 서독 FA컵 1회 우승 기록을 비롯해 주간·시즌 베스트 11 선정 횟수, 경기당 평점 등을 보면 아직은 차범근이 우세해 보인다.
더욱이 차범근은 26세라는 늦은 나이에 유럽 무대에 데뷔한 데다 당시 한국은 프로축구 리그가 출범하기 전이고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간 월드컵 본선에 한 차례도 나가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 난 격이었다.
차범근은 경기도 화성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키가 크고 달리기를 잘해 화성 화산초등학교 때는 육상선수로 활동했고 서울 영도중학교에서는 필드하키 선수로 뛰었다.
2학년 때 서울 경신중으로 전학하며 뒤늦게 축구를 시작했으나 금세 두각을 나타내 경신고 3학년 때 청소년 대표로 뽑혀 태극마크를 달았다.
고려대 1학년이던 1972년 4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팀을 결승에 올려놓은 데 이어 그해 7월 최연소 국가대표로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 대회에 출전해 우승컵을 안았다.
이때부터 한국은 메르데카컵, 태국 킹스컵, 한국의 박대통령배 대회에서 단골로 우승하는 동아시아 강호로 부상했다.
50대 중반 이상의 축구 팬들이 차범근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기억하는 명장면이 있다.
1976년 9월 11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치러진 박대통령배 개막전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종료 7분을 남겨두고 4-1로 뒤지고 있을 때 차범근은 3골을 몰아넣어 극적인 무승부를 만들어냈다.
차범근의 활약을 눈여겨본 분데스리가의 스카우터들이 손짓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축구계 분위기나 여론은 '국위 선양'보다는 '국부 유출'의 관점이 우세했다.
대표팀의 전력이 약화하고 국내 축구 열기가 식는 것을 걱정해 해외 진출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차범근은 우여곡절 끝에 서독으로 날아가 1978년 12월 26일 분데스리가 최하위 팀 다름슈타트와 6개월짜리 가계약을 체결한 뒤 12월 30일 보훔과 데뷔전을 치렀다.
300여 명의 동포가 열렬히 응원하는 가운데 그는 두 골을 도우며 3-1 승리를 끌어냈다.
그러나 병역 문제가 발목을 잡아 귀국했다.
공군 축구단은 차범근을 스카우트하려고 교련 이수 혜택을 합쳐 6개월 복무 단축을 약속했다가 여론이 악화하자 말을 바꿨다.
하는 수 없이 남은 복무기간을 채운 뒤 다시 출국했다.
가계약을 맺은 다름슈타트는 2부로 떨어져 처음부터 그에게 눈독을 들인 프랑크푸르트와 계약했다.
데뷔전은 8월 11일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였다.
비록 팀은 1-0으로 패했으나 차범근은 국가대표 시절의 등번호 11번을 달고 빠른 돌파력과 날카로운 크로스를 선보여 팀 내 최고 평점을 받았다.
그는 데뷔 첫해인 1979∼1980시즌에 12골을 기록해 득점 랭킹 7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그해 UEFA컵 결승전에서도 결승골을 어시스트해 팀에 우승컵을 안겼다.
다음 시즌 부상으로 8골에 그친 것을 제외하고는 해마다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다가 1982∼1983시즌이 끝난 뒤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레버쿠젠에서의 활약은 더욱 눈부셨다.
1985∼1986시즌에는 17골로 득점 랭킹 4위에 올랐고 1987∼1988시즌에는 자신의 두 번째이자 레버쿠젠 최초로 UEFA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1989년 은퇴하기까지 11년간 분데스리가에서 308경기를 뛰며 98골을 넣어 그때까지 외국인 선수 최다골 기록을 세웠다.
현지 언론들은 차범근을 '갈색 폭격기', '한국산 호랑이' 등으로 불렀다.
팬들은 '차붐'이라는 애칭을 즐겨 썼다.
그의 영문 이름 'Cha Bum Kun'을 줄여 부른 것이자 폭발음을 나타내는 의성어를 성에 붙인 것이었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은 2013년 그를 '20세기 아시아 선수' 1위로 꼽았고 2016년에는 '레전드 48인'에 넣었다.
2017년에는 '분데스리가 레전드 9인'에 뽑히는 영예도 안았다.
차범근은 한국 축구를 보는 세계의 눈을 바꿔놓았다.
광부나 간호사 등으로 서독에 이민한 동포들은 그의 경기를 보며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랬다.
국내 팬들도 녹화 중계나 언론 보도를 보며 환호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허정무·서정원·김주성·노정윤·이상윤 등도 유럽 무대를 밟을 수 있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축구 한류가 태동했다.
국가대표로도 A매치 126경기 58골이라는 역대 최다 기록을 지닌 그는 프로축구 울산 현대와 수원 삼성 감독, 중국 선전 핑안클럽 감독, 1998년 프랑스월드컵 국가대표 감독 등을 거쳐 MBC와 SBS 해설위원을 지냈고 현재 차범근축구교실을 이끌고 있다.
젊은 층에는 축구선수 차두리 아빠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지난 4월 19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CBS의 의뢰로 성인 500명에게 차범근과 손흥민 가운데 누가 더 뛰어난지 물은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 손흥민이 51.5%를 기록해 30.5%에 그친 차범근을 눌렀다.
해를 거듭할수록 손흥민은 새로운 기록을 쌓아 차범근과의 격차를 벌릴 가능성이 크다.
세월이 더 흐르면 손흥민을 뛰어넘는 신예 스타가 등장할 것이다.
그래도 차범근이 창조한 신화는 대한민국 축구사의 영원한 전설로 남을 것이다.
(한민족센터 고문) /연합뉴스
이제 우리도 메시와 호날두에 필적할 만한 초특급 선수를 지녔다는 자부심과 함께 몇 년 뒤에는 이들이 국가대표팀을 세계 정상급으로 올려놓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손흥민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전통의 강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박지성(38)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으나 득점을 비롯한 각종 기록과 큰 경기에서의 골 결정력 등을 따지면 무게 추는 손흥민으로 기운다.
그러나 아직도 손흥민이 뛰어넘기 어려운 벽이 있다.
40년 전인 1979년 7월 16일, 독일 분데스리가의 명문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차범근(66)이다.
손흥민은 2016∼2017시즌에 시즌 21골을 넣어 이미 차범근의 유럽 리그 한국인 단일 시즌 최다골(19골) 기록을 경신했고, 유럽 리그 개인 통산 116골로 다음 시즌에는 차범근의 121골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UEFA컵 2회와 서독 FA컵 1회 우승 기록을 비롯해 주간·시즌 베스트 11 선정 횟수, 경기당 평점 등을 보면 아직은 차범근이 우세해 보인다.
더욱이 차범근은 26세라는 늦은 나이에 유럽 무대에 데뷔한 데다 당시 한국은 프로축구 리그가 출범하기 전이고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간 월드컵 본선에 한 차례도 나가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 난 격이었다.
차범근은 경기도 화성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키가 크고 달리기를 잘해 화성 화산초등학교 때는 육상선수로 활동했고 서울 영도중학교에서는 필드하키 선수로 뛰었다.
2학년 때 서울 경신중으로 전학하며 뒤늦게 축구를 시작했으나 금세 두각을 나타내 경신고 3학년 때 청소년 대표로 뽑혀 태극마크를 달았다.
고려대 1학년이던 1972년 4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팀을 결승에 올려놓은 데 이어 그해 7월 최연소 국가대표로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 대회에 출전해 우승컵을 안았다.
이때부터 한국은 메르데카컵, 태국 킹스컵, 한국의 박대통령배 대회에서 단골로 우승하는 동아시아 강호로 부상했다.
50대 중반 이상의 축구 팬들이 차범근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기억하는 명장면이 있다.
1976년 9월 11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치러진 박대통령배 개막전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종료 7분을 남겨두고 4-1로 뒤지고 있을 때 차범근은 3골을 몰아넣어 극적인 무승부를 만들어냈다.
차범근의 활약을 눈여겨본 분데스리가의 스카우터들이 손짓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축구계 분위기나 여론은 '국위 선양'보다는 '국부 유출'의 관점이 우세했다.
대표팀의 전력이 약화하고 국내 축구 열기가 식는 것을 걱정해 해외 진출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차범근은 우여곡절 끝에 서독으로 날아가 1978년 12월 26일 분데스리가 최하위 팀 다름슈타트와 6개월짜리 가계약을 체결한 뒤 12월 30일 보훔과 데뷔전을 치렀다.
300여 명의 동포가 열렬히 응원하는 가운데 그는 두 골을 도우며 3-1 승리를 끌어냈다.
그러나 병역 문제가 발목을 잡아 귀국했다.
공군 축구단은 차범근을 스카우트하려고 교련 이수 혜택을 합쳐 6개월 복무 단축을 약속했다가 여론이 악화하자 말을 바꿨다.
하는 수 없이 남은 복무기간을 채운 뒤 다시 출국했다.
가계약을 맺은 다름슈타트는 2부로 떨어져 처음부터 그에게 눈독을 들인 프랑크푸르트와 계약했다.
데뷔전은 8월 11일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였다.
비록 팀은 1-0으로 패했으나 차범근은 국가대표 시절의 등번호 11번을 달고 빠른 돌파력과 날카로운 크로스를 선보여 팀 내 최고 평점을 받았다.
그는 데뷔 첫해인 1979∼1980시즌에 12골을 기록해 득점 랭킹 7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그해 UEFA컵 결승전에서도 결승골을 어시스트해 팀에 우승컵을 안겼다.
다음 시즌 부상으로 8골에 그친 것을 제외하고는 해마다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다가 1982∼1983시즌이 끝난 뒤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레버쿠젠에서의 활약은 더욱 눈부셨다.
1985∼1986시즌에는 17골로 득점 랭킹 4위에 올랐고 1987∼1988시즌에는 자신의 두 번째이자 레버쿠젠 최초로 UEFA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1989년 은퇴하기까지 11년간 분데스리가에서 308경기를 뛰며 98골을 넣어 그때까지 외국인 선수 최다골 기록을 세웠다.
현지 언론들은 차범근을 '갈색 폭격기', '한국산 호랑이' 등으로 불렀다.
팬들은 '차붐'이라는 애칭을 즐겨 썼다.
그의 영문 이름 'Cha Bum Kun'을 줄여 부른 것이자 폭발음을 나타내는 의성어를 성에 붙인 것이었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은 2013년 그를 '20세기 아시아 선수' 1위로 꼽았고 2016년에는 '레전드 48인'에 넣었다.
2017년에는 '분데스리가 레전드 9인'에 뽑히는 영예도 안았다.
차범근은 한국 축구를 보는 세계의 눈을 바꿔놓았다.
광부나 간호사 등으로 서독에 이민한 동포들은 그의 경기를 보며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랬다.
국내 팬들도 녹화 중계나 언론 보도를 보며 환호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허정무·서정원·김주성·노정윤·이상윤 등도 유럽 무대를 밟을 수 있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축구 한류가 태동했다.
국가대표로도 A매치 126경기 58골이라는 역대 최다 기록을 지닌 그는 프로축구 울산 현대와 수원 삼성 감독, 중국 선전 핑안클럽 감독, 1998년 프랑스월드컵 국가대표 감독 등을 거쳐 MBC와 SBS 해설위원을 지냈고 현재 차범근축구교실을 이끌고 있다.
젊은 층에는 축구선수 차두리 아빠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지난 4월 19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CBS의 의뢰로 성인 500명에게 차범근과 손흥민 가운데 누가 더 뛰어난지 물은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 손흥민이 51.5%를 기록해 30.5%에 그친 차범근을 눌렀다.
해를 거듭할수록 손흥민은 새로운 기록을 쌓아 차범근과의 격차를 벌릴 가능성이 크다.
세월이 더 흐르면 손흥민을 뛰어넘는 신예 스타가 등장할 것이다.
그래도 차범근이 창조한 신화는 대한민국 축구사의 영원한 전설로 남을 것이다.
(한민족센터 고문)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