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규제 강화 조치 이후 한국 정부의 대응 방식에 대해 “안이한 현실 인식”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혹평했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 가동이 중단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韓·日 경제전쟁으로 대만 TSMC·美 마이크론 반사이익"
황철성 서울대 무기재료학과 교수는 4일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를 강화한 고순도 불화수소는 식각 등 미세 공정 후 찌꺼기를 없애는 과정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반도체 핵심 소재”라며 “수출 규제가 조속히 풀리지 않으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 가동이 전면 중단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황 교수에 따르면 700개 안팎에 이르는 반도체 공정 중 불화수소를 사용하는 공정만 50개 이상이다. 그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반도체 공정 중 단 한 공정에 문제가 발생해도 공장 전체 라인이 중단될 수 있다”고 했다.

미국 마이크론, 대만 TSMC 등 경쟁사들이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소장(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은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를 받는 포토레지스트(감광액)는 최첨단 반도체 파운드리(수탁생산)의 노광 공정에 쓰이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에 필수적”이라며 “분초를 다투는 기술 혁신 경쟁에서 우리 기업들이 경쟁사에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파운드리업계 세계 1, 2위 업체인 TSMC와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대당 수천억원짜리 EUV를 대량 구입하면서 기술 혁신 경쟁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는 지난 2일 퀄컴, 엔비디아 등 파운드리 시장 주요 고객사에 “납품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한국 정부가 보복 조치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의 일본 수출을 규제하면 소니와 파나소닉은 현재 시장에 팔고 있는 대형 OLED TV를 생산할 수 없다”며 “보복 조치가 오가면 양국 기업 모두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미·중 무역전쟁처럼 확전될 경우 첨단산업 기술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자국 시장 규모가 작은 한국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며 “확전은 막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