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로템은 지난달 27일 대만철도청(TRA)이 발주한 통근형 전동차 공급사업을 따냈다. 전동차 520량에 대한 총 수주금액은 9098억원. 차량 한 대당 공급 가격은 17억5000만원에 달했다. 출혈 경쟁은 없었다. 현대로템은 대만철도청이 제시한 예정가격(예가) 대비 98.5% 수준의 가격을 제시해 수주에 성공했다. 제품 기술력을 인정받아 최대한 제값을 받고 수주했다는 뜻이다.
출혈 경쟁 부추기는 입찰 제도

현대로템은 올해에만 캐나다 밴쿠버 무인경전철, 대만 녹선 무인경전철 사업을 잇따라 수주했다. 해외 시장에 공을 들이는 건 그만큼 국내 시장이 한계 상황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 원인으로는 최저가 입찰 방식이 꼽힌다. 업체 간 제 살 깎아 먹기식 출혈 경쟁이 도를 넘었다는 게 업계 지적이다.

지난해 7월 서울메트로 2호선 214량 구매 프로젝트에서 현대로템은 예가 대비 73.8%의 낮은 가격을 제시해 겨우 낙찰에 성공했다. 1량당 가격은 8억2000만원에 불과했다. 구체적인 조건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대만에서 수주한 전동차 가격의 절반 수준이다.

같은 달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발주한 진접선 50량 입찰에서는 예가 대비 63.2% 수준의 가격을 제시해 낙찰에 성공했다. 1999년 이후 가장 낮은 낙찰가 비율이다. 국내 입찰에서 출혈 경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시장에는 손해를 감수하고 수주전에 뛰어드는 것이 현실”이라며 “공공기관이 철도·전선 등의 분야에서 최저가 입찰로 출혈 경쟁을 강요하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나친 저가 수주의 폐해는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선·철도업계가 가격을 인하하기 위해 중국산 부품을 쓰는 등 고육책을 짜내면서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공공기관은 국가계약법에 따라 기본적인 기술 평가를 통과한 업체를 대상으로 최저가 입찰을 진행하고 있다. 1단계 기술 평가에서 일정 점수를 받은 업체를 선별하고, 2단계에서는 최저 가격을 제안한 업체를 선발한다. 기술 평가 기준이 높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더 낮은 가격을 써낸 기업이 수주하는 구조다. 국내 입찰에서 예가 대비 낙찰가 비율이 유독 낮게 나오는 이유다.

“선진국은 자국 산업 보호하는데….”

업계에서는 가격 경쟁도 필요하지만 가격과 기술력을 동시에 평가하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유럽 등 선진국처럼 국가 기간사업 입찰에서 기술과 가격을 함께 따지는 종합평가제도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일정 수준의 기술력을 충족하면 가격으로 ‘무한 경쟁’을 하게 된다. 글로벌 기업들도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면서 출혈 경쟁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전선업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업계에 따르면 한국전력은 올해 발주 예정인 고덕~당진 2차 HVDC(초고압 직류 송전) 케이블 입찰을 ‘국제 입찰’로 진행할 예정이다. HVDC는 대용량의 전력을 장거리로 보내면서도 손실을 대폭 줄일 수 있는 첨단 케이블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는 데다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늘어나면서 관련 수요도 늘고 있다. 남북한 경제협력과 ‘동북아 슈퍼 그리드’ 등 중요 전력망 구축에도 필수적이다.

HVDC 케이블은 유럽과 일본 업체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국내 업체의 기술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LS전선은 지난 5월 세계 최초로 HVDC 케이블에 대한 공인 인증을 받을 정도로 기술력을 끌어올렸다. LS전선 관계자는 “외국 업체가 수주했다가 제품 결함이 발생했을 때 애프터서비스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LS전선이 나서서 보수 작업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기술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문제는 규모의 경제로 승부하는 글로벌 기업과 붙었을 때 가격으로는 경쟁이 어렵다는 점이다. 해외 수주를 따내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전선업계 관계자는 “이탈리아, 프랑스 등은 자국 전력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자국 전선업체인 프리즈미안, 넥상스 등과 긴밀한 협업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며 “국내 공공입찰 시스템도 국가 경쟁력 제고라는 큰 틀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이 최저가 입찰에만 집중한 나머지 국내 기간 사업 육성에 소홀한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온다. 중국에서는 공급 과잉으로 인한 출혈 경쟁으로 자국 철도산업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1국가 1기업’ 체제를 내세워 내수 물량을 집중 지원하고, 수출을 장려하고 있다. 미국도 철도차량을 제작할 때 재료비의 70% 이상을 미국산 부품으로 사용하고, 최종 조립은 미국 내에서만 하도록 하는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가격 경쟁을 부추기는 국제 입찰 방식을 더 선호하는 추세다. 용인 의정부 등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전철 사업을 일본 미쓰비시와 히타치, 캐나다 봄바르디에, 독일 지멘스 등이 수주하게 된 배경이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