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파리의 행진
2013년 8월23일 ‘워싱턴 행진’ 행사에 미국 공화당 정치인 중에는 참석자가 없었다는 것이 작은 화제였다.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I have a dream’ 연설 50주년, 노예해방 150년 기념 행사에 공화당 인사들은 이 핑계 저 구실로 참석을 꺼렸던 것이다. 이미 흑인 대통령 시대까지 이른 데다 이 행사가 친민주당 행사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공화계 인사들의 냉정성이 엿보였다고나 할까. 대중행사라면 성격을 불문하고 얼굴 내밀려는 게 정치인들의 DNA이기에 더욱 이례적이었다.

정치인들의 대중 노출증은 연예인 저리가라다. 신문에 이름이 난다면 본인 부음 빼고는 무조건 사양하지 않는다는 우스개도 이미 고전이다. 로마의 황제들도 수시로 대중행사를 열었다. 스스로 ‘제1의 시민’이라며 포퓰리즘을 자극했다. 물론 노출증 DNA와 명예욕이 유독 강한 성격의 인물들이 정치에 나설 것이다. 선거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현대 정치인은 더할 것이다. 대중 속으로! 서민에게로!라지만 실제는 표앞으로!다. 현장을 지킨다는 의무감도 없진 않겠지만 군중에게 손흔드는 맛에 정치한다는 이들도 많다.

혁명과 시위의 역사 때문일까. 다문화와 톨레랑스의 전통에 기인한 것인가. 프랑스에서는 유달리 정치인 등 유명 인사들을 앞장 세운 거리 행진이 많다. 종교 차별 반대, 인종 차별 불가, 동성 결혼엔 찬성 따로 반대 따로…. 명분도 다양하다. 말이 행진이지 내용은 시위다. 때로는 세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100만명 규탄 행진이 그제 일요일 파리 도심에서 열렸다. 낯익은 정치인들이 맨 앞줄을 차지했다.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 바로 옆에 독일 총리와 말리 대통령이 섰다. 이탈리아·이스라엘 총리도 보인다. 40개국의 정상급이 파리 대로에 모였다. 진지한 표정들에서 테러에 대한 우려와 근절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약간은 나이브한 측면도 없지는 않다. 광장에 잔뜩 몰려가 스스로 테러리스트의 목표물로 나선 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든다.

한쪽에선 시리아·이라크 기반의 IS와 예멘 등지의 알카에다 세력이 ‘테러 경쟁’에 돌입했다는 분석도 들어오는 판이다. 혹여라도 테러 대응전까지 국내 정치용 이벤트로 여긴다면 유감이다. NGO와 공직자들은 달라야 한다. 가장 큰 차이는 책임성이다. 사회단체처럼 거리에서 구호를 외칠 시간에 대테러 전략을 세우고 테러범을 소탕해야 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