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베풂과 원한의 척도
선현들은 인색함의 의미를 ‘부족함’으로 풀이했다. 기(氣)가 부족한 것이든,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것이든 부족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부족하면 채우려고 하고, 불안하면 비축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인색할 수밖에 없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인색과 관련한 두 가지 경계를 들고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인색한 경우다.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치료도 제대로 못해본 채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남에게 인색한 경우다. 자기에게 필요치 않은 것이라도 남에게 주는 것은 무조건 싫어한다. 자기 배는 부르고, 남겨두면 음식이 상해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성호가 예로 든 화원(華元)과 자가(子家)는 모두 춘추시대 사람들이다.

화원이 어느 날 염소를 잡아서 그 부하 군사를 먹였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마부 양짐(羊斟)이 그 자리에 끼지 못했다. 앙심을 품은 양짐은 화원을 실은 수레를 몰고 적진으로 투항해 버렸다. 자가도 자공(子公)과 함께 임금이 자라탕을 나누어주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그 임금을 시해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국 한 그릇 같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반역을 한다는 것이 우습기조차하다. 그러나 공자도 조정의 음복 고기가 자신에게 배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라를 떠난 적이 있을 정도로 나름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사실 30여년 전까지도 불천위(不遷位) 제사 때 음복의 양이 고르지 않다는 이유로 노인 제관(祭官)들이 유사(有司)를 불러 호통을 치는 일이 잦았다. 우리나라에서 배고픔이 어느 정도 사라졌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단순히 음식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당한 대우를 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중산국(中山國) 임금도 위의 두 경우처럼 양고기 국 때문에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호위하며 따라오던 두 병사를 보고 물었다.

“너희는 내가 특별히 은혜를 베푼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냐.”

두 병사는 말했다. “임금님께서는 굶어 죽어가던 저희 아비에게 밥 한 덩이를 내려 살려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저희는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목숨을 바치라고 한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탄식했다. “베풀어주는 것은 그 양의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얼마나 절박한가에 달렸고, 원한을 사는 것은 그 정도의 깊고 얕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구나.”

일이 닥치기 전에 이런 이치를 미리 깨닫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