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사초(史草)는 세검정에서 빨고…
왕의 일거수일투족은 사관(史官)에 의해 모두 기록됐다. 역대 왕들은 이를 의식해 언행을 삼갔다. 사관의 1차 기록인 사초(史草)는 아무리 궁금해도 볼 수 없었다. 역사왜곡을 법으로 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조선조 태조 이성계는 정통성 논란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어느 날 고려 공양왕 때의 사초에 “우왕과 창왕을 죽인 자는 이성계”라고 기록돼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모골이 송연했다. 사초를 모조리 바치라고 명한 그는 결국 우왕과 창왕이 요승 신돈의 자손이라는 내용을 슬며시 집어넣으며 역사에 덧칠을 했다.

영조는 사초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심야회동 내용을 “기록하지 말라”고 지시하고는 다음날 자신이 쓴 내용을 사관에게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사관은 이를 돌려주면서 “쓰지 말라”고 한 말과 함께 “임금의 위엄만 먹혀들지 않았다”는 평까지 덧붙였다. 사관은 보고 들은 바를 가감없이 기록한 사초를 실록(實錄) 편찬 때 실록청에 제출했다. 처음 작성한 원고는 초초(初草), 이를 보완한 것은 중초(中草), 최종본은 정초(正草)라 했다. 실록이 완성되면 사초는 세검정에 가져가 계곡 물에 씻어버리고 종이는 재생했다. 종이를 아끼자는 뜻도 있었지만 내용 유출을 막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실록은 활자로 인쇄해 중앙과 지방에 봉안했다. 왕이 꼭 봐야 할 때도 관리를 보내 해당 부분만 베껴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실록은 고려시대부터 편찬됐는데 모두 유실되고 조선시대 것만 남아 있다. 폐위된 왕의 실록은 ‘노산군일기’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 등 일기로 남겼다.

왕의 일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한 달에 1~2권으로 작성했다. 승정원(대통령 비서실)이 기록한 일기는 3243책 2억3000여만자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역사기록이다. 내용도 세세해서 정조 16년 윤4월 27일 경상도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렸던 일을 기록하면서 1만57명 명단까지 다 실었다. 같은 날 실록에 상소문만 실린 것과 대조적이다. 288년에 걸친 기상 자료와 한의학 관련 내용도 희귀자료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된 이유다.

폭군 연산군도 사초를 두려워했지만 결국 이성계 흉내를 내고 말았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종실록’ 사초에 삽입한 김일손의 초고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슬 퍼런 명령이 계속되자 실록청은 해당 구절만 절취해 올렸다. 결국 그가 본 것은 발췌본이었다. 요즘 대통령 기록을 놓고 말이 많다. 처음부터 국가기록원에 제출하지 않았다는 의혹까지 번지고 있다. 사초의 행방은 묘연하고, 여기저기 말만 무성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