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格)이라는 것이 있다. 격에 맞지 않으면 실격이 된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직위를 가진 사람은 더더욱 격을 지켜야 한다. 말도 격에 맞게 해야 하고, 행동도 격에 맞게 해야 한다. 업무 수행도 격에 맞게 해야 하고, 마인드도 격에 맞게 가져야 한다.

고위직의 격은 얼마나 위임을 잘 했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서류 작성 같은 실무적인 일은 줄어들지만, 반대로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은 늘어간다. 다양한 분야에 신경을 분산해야 하므로 자칫하면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 하위직이 할 일까지 일일이 간섭하다 보면 그럴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우암(尤菴) 송시열이 갓 즉위한 효종(孝宗) 임금에게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란 글이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우암의 이 글은 주로 효종 당시 시도됐던 북벌(北伐)과 관련된 사료로 인용되는 일이 많다. 하지만 그 속에는 경영자의 자세와 관련해 눈여겨 볼 만한 내용도 들어 있다.

“한(漢)나라 고조의 책사로 창업의 일등공신이었던 진평이 훗날 좌승상이 됐을 때다. 하루는 고조가 그에게 한 해 동안의 전곡(錢穀)의 수입과 지출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그러자 진평은 ‘그 일은 따로 담당하는 유사가 있다’라며 구체적인 숫자를 모르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 무제(武帝) 때, 정승인 병길이 길을 가다가 소가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고는 수행하던 부하를 시켜 이유를 물어보게 했다. 부하가 의아해하며 ‘아까는 길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시더니, 소가 헐떡이는 것은 어째서 관심을 두십니까’라고 물었다. 병길은 ‘사람이 죽은 것이야 담당하는 관리가 처리할 일이니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재상인 나의 직분은 음양을 조화시키는 것인데 한여름도 아닌 철에 소가 헐떡이는 것은 혹시 음양이 조화를 잃은 것이 아닌가 하여 물어본 것이다’라고 했다.”

유교문화권에서 재상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사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전통적 리더십보다는 자잘한 일까지 직접 꼼꼼하게 챙기고 다방면으로 능력을 보여주는 리더십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물론 일에 전혀 무관심하고 무능한 것보다는 낫겠지만 다양화되고 전문화된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어쭙잖게 모든 일에 간섭하다가는 자칫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정신의 과도한 분산과 기력의 저하로 자신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부하들까지도 의욕을 잃거나 나태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교문화권 제왕학의 대표적 고전인 ‘서경(書經)’에는 “머리인 임금이 자잘한 일까지 직접 챙기면 팔다리인 신하가 게을러져서 만사가 엉망이 될 것이다”라고 나온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가장 훌륭한 리더는 유능한 인재들을 발탁해 자신의 주변에 둘 수 있는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다. 또한 그들이 자신의 일을 수행할 때 전혀 간섭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자기 절제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다”라고 했다. 위임을 통한 효율성 제고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치를 안다고 해서 다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치를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당시로서는 고령이라고 할 수 있는 54세의 몸으로 원정 부대 대소사를 직접 처리하다가 부하의 충고를 받았던 제갈공명의 경우에서도 그런 사례를 볼 수 있다. 우암이 인용한 양옹의 간언에는 다음 내용이 더 들어 있다.

“다스림에는 일정한 규범이 있는 법이니, 상하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노비들이 할 일을 주인이 직접 맡아서 처리한다면 심신이 지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런 일에 대한 지식이 노비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지략가라는 제갈공명조차도 그런 우를 범했던 것을 보면 윗사람이 돼서 잠자코 보고만 있기란 결코 쉽지 않은가 보다.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