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큰 일이 성사됐을 때 사람들은 대개 그 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사람을 추어올린다. 그 역시 자신의 공이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항이 있다. 그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지원해 준 윗사람의 역할이다.

“신은 말하는 것이 경솔하고 일 처리가 어긋나서 한 번씩 나고 들 때마다 걸핏하면 비방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전후로 낭패를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만약 전하께서 곡진하게 보살펴 주신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신이 어찌 오늘날까지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물거품도 많으면 산을 떠내려 보낼 수 있고, 비방도 쌓이면 뼈를 녹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증삼(曾參)과 같은 아들을 두고도 오히려 와전된 말이 세 번째 들리자, 그 어미는 베틀의 북을 던지고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신을 신뢰하는 것이 증삼의 어미와 같지 못하고, 신료들이 사사건건 생트집을 잡는 것이 세 번 정도에 그칠 뿐만이 아니니, 아무리 전하께서 아끼고 보살펴 주신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소신의 나이가 이미 육순에 이르렀습니다. 노쇠한 몸은 그저 땅속에 묻힐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어쩌자고 감히 호랑이 꼬리를 밟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처럼 수치를 무릅쓰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구하겠습니까.”

동계(桐溪) 정온이 59세 때인 1627년에 새로 임명된 대사간(大司諫) 벼슬을 사양하기 위해 올린 상소의 일부분이다. 대사간은 임금에게 직언을 진달하는 기능을 지닌 사간원(司諫院)의 수장이었다. 이처럼 높은 벼슬을 사양하는 글은 관행적인 것이 많았다. 보통 노부모의 봉양, 나이, 건강상 문제 등을 대지만, 실상은 으레 두세 번쯤 사양하는 ‘예사(例辭)’가 대부분이었다.

동계의 상소는 그런 글이 아니다. 임금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벼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완곡하지만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증자(曾子)와 같은 인격자도 몇 차례 와전된 소문으로 인해 어머니의 신뢰를 잃을 정도였으니, 임금의 일시적인 총애를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이런 우려는 스승인 내암(來庵) 정인홍과의 관계로 인해 씌워진 낙인 때문이었다.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된 내암을 위해 적극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평생 스승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언관들은 그의 결점을 공격할 때 늘 역적의 제자라는 사실을 거론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뜻이 맞아 훌륭한 정치를 이뤄내는 경우를 두고 ‘풍운제회(風雲際會)’, 또는 ‘제회’라고 한다.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는 주역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임금과 신하의 아름다운 만남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그런 만남에서 가장 돋보이는 덕목은 의외로 신하의 충성심이나 재주가 아니다. 신하에 대한 임금의 굳건한 믿음과 격려, 예우다. 충성스럽고 재주 있는 신하는 많았지만, 신하를 제대로 예우하고 믿어주는 임금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대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추진할 때는 임금의 믿음과 결단이 필수적이다.

다음 고사는 중대사의 성공에 있어 임금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보여 준다. 신하, 부하 노릇하는 자가 이런 임금이나 상사를 만났다면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행운이 아닐까 싶다.

춘추시대 위나라 장수 악양이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러 떠나 3년 만에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였다. 자식까지 희생시켜 가며 세운 공이 있는지라 의기양양해 하며 임금 문후(文侯)를 찾아갔다. 왕은 말없이 두 개의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 속에는 악양을 비방하고 중산국 정벌을 반대하는 상소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악양은 태도를 바꾸고 임금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번의 개가는 신의 공이 아닙니다. 주군께서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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