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를 어둡게 바라보는 잿빛 보고서들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3분기에 1%대 성장을 기록한 데 이어 내년에도 2%대 저성장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대표적이다. ‘엔고’는 시들해지고 원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유일한 기대주인 수출도 안심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올해보다 내년이 좋을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정부도 톤 조절을 하는 모습이다.

모두 위기라고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마냥 움츠러 있지만은 않을 태세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경제민주화 바람이 투자 의욕을 꺾고 있지만 여전히 “기업으로서 할 일은 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언제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냐”며 위기를 먹고 자라온 한국 특유의 기업가 정신으로 불황을 뚫고 나갈 방침이다.

○위기경영으로 저성장 시대 극복

국내 4대 그룹은 그 어느 때보다 내년을 중요한 시기로 보고 위기경영의 고삐를 죄고 있다.

가장 발빠르게 긴장모드로 전환한 곳은 삼성이다. 삼성은 최근 전 계열사 임원 새벽 6시30분 출근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토요일에 출근하는 임원들도 늘고 있다. 1차로 끝내는 절주 캠페인은 빠르게 정착되고 있다.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을 하고 있지만 잔칫집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삼성이 긴장의 고삐를 죄고 있는 이유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글로벌 경기 침체 때문이다. 캐시카우 역할을 해온 모바일 사업도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며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삼성은 빠른 추종자 전략에서 벗어나 혁신적 신제품으로 위기를 극복할 방침이다. “세계인이 열망하는 브랜드(Aspirational Brand)로 도약하겠다”는 삼성전자의 비전이 대표적 사례다.

현대자동차는 내실경영을 통해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세계 경기 둔화에 맞서 질적 성장과 글로벌 생산체제 구축으로 위기를 돌파한다는 전략도 수립했다. 친환경 자동차 같은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연구·개발(R&D) 투자도 지속적으로 늘리기로 했다.

LG는 ‘시장 선도’를 위기 극복 화두로 정했다. 구본무 LG 회장은 지난 9월 “시장을 선도하지 못하면 더 이상 고객과 인재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평범한 기업으로 남게 된다”며 임직원들에게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불황이라고 하지만 시장 선도 제품을 내놓기 위해 R&D 투자도 확대할 방침이다.

SK는 해외 시장 개척으로 경기 침체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불황 속에서도 공격적 경영을 펼치겠다는 복안이다. 자원개발을 해외 사업의 핵심 축으로 삼고 국내에선 SK하이닉스를 통해 반도체 사업을 더욱 키워나갈 계획이다. 이와 함께 위기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시나리오 경영을 펼칠 방침이다.

○신제품으로 위기 타개

포스코는 현 시기를 불확실, 불안정, 불연속으로 대표되는 ‘3불 시대’로 규정하고 비상경영 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전체 4단계로 구분되는 경영 전략 중 최악의 상황인 4단계보다 한 단계 낮은 3단계로 대응 수위를 높였다. 감산 직전 단계까지 대응 수위를 올리는 동시에 고수익 상품으로 경쟁사를 압도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현대중공업도 고부가가치 선박과 신규 플랜트를 개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주를 확대하고 사업을 다각화하는 작업은 계속 진행형이다.

두산 역시 첨단제품으로 위기를 타개할 방침이다. 해외 생산거점을 확대하고 친환경 기술 개발에도 주력할 계획이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중남미와 인도, 러시아, 동남아시아 등 신흥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동부는 신성장동력을 확보해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다양한 파생사업으로 반경을 넓혀 시너지를 내겠다는 전략도 마련했다.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의 사업을 사들이고 대우일렉 인수를 추진하는 게 좋은 예다.

대기업들은 공격형 전략을 펼치면서도 투자 부문에선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삼성은 지난 6월 경기 화성에 짓기 시작한 시스템 반도체 17라인 공사를 잠정 중단키로 했다. 불황으로 TV나 스마트폰 판매량이 줄면 핵심 부품 중 하나인 시스템 반도체 수요도 줄기 때문이다. 삼성디스플레이도 당초 올해 말 완공하려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A3라인 공사를 보류하고 기존 A2라인을 연장한 A2E 라인을 짓기로 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