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들어 일본경제가 호황을 누리며 엄청난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하자 재정과 무역에서 쌍둥이 적자에 허덕이던 미국이 엔화가치를 높이라고 일본에 압력을 가했다. 그래야 일본의 수출경쟁력이 약화돼 무역흑자가 줄어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1985년 9월 미국의 도움요청을 받은 영국 프랑스 독일과 일본 등 G5 재무장관회의가 열려 엔화절상을 내용으로 하는 플라자협약을 맺었다. 당시 1달러당 235엔이던 엔화가 1년 만에 120엔으로 두 배 가까이 절상될 정도로 이 합의는 일본경제 ‘잃어버린 10년’의 신호탄이 됐다.

그런데 미국은 무역적자 요인으로 엔화가치만 꼽은 게 아니다. 장시간근로도 함께 지목했다. 일본 기업들이 레이버 덤핑(labor dumping)을 통해 무역흑자를 내고 있으니 장시간근로를 선진국 수준으로 단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일본 제조업의 연간 근로시간은 2300시간을 넘어 독일 프랑스보다 600시간 이상, 미국보다도 400시간가량 길었다. 결국 당시 나카소네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장시간근로 무역흑자 요인

일본 후생노동성은 주 48시간인 법정근로시간을 1987년부터 1997년까지 10년간 40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으로 노동기준법을 개정, 시행에 들어갔다. 시행 초기에는 실근로시간이 많이 줄었다. 제조업의 경우 1987년 연 2300시간에서 1993년 2100시간까지 200시간이나 감소했다. 그러나 근로시간 단축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 후 20년간 근로시간은 줄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기업들의 장시간 노동을 방관했기 때문이다. 일본 전체의 근로시간 감소는 파트타임 증가에 따른 것이다.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치구호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모양이다. 그는 장시간근로를 개선해 저녁이 있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자고 주장한다. 그래야 일자리도 창출돼 아침이 있는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말 멋진 구호다. 손 고문은 이를 위해 정시퇴근제 도입, 연장·휴일근로 제한 등으로 연간 노동시간을 200시간 단축하겠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한다. 어떤 전문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독일 프랑스 등의 짧은 근로시간과 경쟁력을 연결시키면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는 장시간 노동을 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무지의 극치다.

싱가포르·홍콩은 더 길어

아시아 네 마리 용의 국가경쟁력과 근로시간을 살펴보면 얼마나 황당한 주장들인지 알 수 있다. IMD(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가 올해 발표한 국가경쟁력 1위는 연간 근로시간 2287시간(2009년 기준)인 홍콩이 차지했다. 4위인 싱가포르도 연간 근로시간이 2307시간으로 우리나라 2180시간(2011년)보다 길다.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들이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홍콩 3만4393달러, 싱가포르 5만714달러다. 대만은 2144시간(2011년)으로 우리보다 다소 짧지만 국가경쟁력은 7위에 랭크돼 있다. 일본에선 노사가 합의만 하면 장시간노동도 가능하다. 실제로 주당 60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들이 500만명에 육박한다. 근로시간과 국가경쟁력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얘기다. 현대자동차 근로자가 독일의 폭스바겐처럼 주당 30~40시간 일한다고 쏘나타가 폭스바겐 차량에 비해 기술적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정치권과 정부가 요즘 ‘저녁있는 삶’을 너무 탐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출근할 일자리가 없어지는 ‘아침없는 삶’으로 전락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윤기설 좋은일터연구소장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