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대현동 이화여대 포스코관 152호. 언론홍보영상학부 전공과목인 ‘미디어&소셜 체인지’ 수업을 들으러 온 수강생들의 얼굴 표정이 한결같이 굳어 있었다. 지난달 초 외국인 20여명을 포함해 70명이 수강을 신청한 인기 전공과목 수업이 한 달 동안 파행을 거듭하다 수업 일수를 채우지 못해 중간고사 날짜까지 24일로 한 주 미뤄진 것.

강의실 밖에서 기자와 만난 이정민 씨(언론홍보영상학부 2학년)는 “이럴 거면 등록금은 왜 인상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사정은 이랬다. 시간강사 A씨는 강의를 맡기로 한 직후 한 연구소에 정규직으로 들어갈 기회가 손에 닿을 듯하자 휴강하거나 수업시간 중 영화(DVD)를 보여주는 걸로 시간을 때웠다. 지난달 27일에야 A씨는 “연구소에 정규직으로 취업해 부득이하게 강사직을 그만두게 됐다”고 일방 통보했다. 학교 측은 부랴부랴 다른 시간강사로 교체해 수업을 진행했으나 수업 일수를 채우지 못해 중간고사를 연기한 것. 학교 측은 강사 A씨와 말로 하는 계약 외에 근로계약을 맺지 않아 수업 파행에 따른 모든 피해는 비싼 등록금을 낸 학생들 몫이었다.

지난 1월부터 전국 대학에서 강의하는 시간강사들도 대학 측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도록 법(근로기준법)이 바뀌었다. 노사 간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약자인 시간강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을’의 입장인 시간강사는 ‘갑’인 대학 측에 밉보이기도 싫고, 스스로 언제든지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있다는 이유로 근로계약서 작성 요구를 기피하고 있다. 대학 측도 향후 법적소송에서 불리해질 문서를 남기는 걸 꺼려 법 시행 4개월이 지났지만 전국 7만7000여명 시간강사 대부분이 구두 계약만으로 강의하고 있다. 근로계약서 없이 일하다 잦은 휴강이나 이직으로 생기는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생들이 떠안고 있다.


◆서울대조차 규정 타령, 위촉장으로 대신

고용노동부는 1월부터 대학이 시간강사를 채용할 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도록 근로기준법이 개정됐다고 밝혔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말로만 계약하면 노사 간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근로자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본지 취재 결과, 대다수의 대학은 이를 지키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기준 전국 각 대학의 시간강사는 7만7000여명. 대학 교육 인력의 절반 이상(대학 52.9%, 전문대 65.2%)을 차지한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를 비롯해 서울 시내 주요 대학들도 시간강사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강사가 원할 경우 재직증명서 형식의 ‘위촉장’만 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박사학위를 지닌 시간강사 중 상당수가 기본적인 계약서도 한 장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셈이다.

국립대인 서울대도 단 한 줄짜리 ‘위촉장’으로 근로계약을 대신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위촉장에는 ‘△학년도 △학기 △대학 시간강사를 위촉함’이라는 문구만 나와 있을 뿐, 법에서 정한 임금이나 근무 조건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서울대 관계자는 “시간강사는 일괄적으로 위촉장 형식만 제공하고, 겸임 교수나 초빙 교수에 한해서만 근로계약서 형식을 제공하는 것이 학교 내규”라고 해명했다. 이화여대 관계자도 “그게(계약서 작성) 원칙인 것은 알고 있다”며 “1300명에 달하는 시간강사와 일일이 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현실적으로 쉽진 않다”고 설명했다. 이동희 고용부 근로개선정책과 감독관은 이에 대해 “계약서를 인터넷에 게시하고 강사 각자가 서명한 뒤 학교 측에 제출하는 등 계약서 작성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반박했다.

◆강사는 대학 눈치, 대학은 후환 두려워 기피

시간강사와 대학이 근로계약서를 맺지 않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겉으로 갑의 입장인 대학이 일방적으로 문서 계약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일부 시간강사도 계약서 작성을 꺼리긴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1차 원인으로 학교 측이 시간강사의 임금이나 근무 조건 등을 외부에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학교마다 강사 비용이 다르고, 같은 학교 안에서도 A·B·C등급으로 나눠 강의료를 다르게 책정하고 있다. 이를 공개하길 꺼리는 것이다. 지난해 A대학은 연수입이 2600만원보다 적은 이들은 ‘전업 시간강사’로, 이보다 많으면 ‘비전업 시간강사’로 구분한 뒤 강의료에 차등을 두겠다고 했다가 시간강사들의 반발을 산 적이 있다.

대학으로선 계약서를 두지 않으면 ‘해고 통보’ 등 행정 절차도 간편해진다. 학교 측이 시간강사를 좀 더 수월하게 다룰 수 있다는 의미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대학(사용자) 측은 시간강사(노동자)를 해고하려면 20~30일 전에 통보해야 한다. 하지만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이런 절차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김영곤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 고려대분회장은 “다음 학기 강의를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지 못하면 해고를 당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시간강사들이 근로계약서를 원하지 않는 건 대학 측에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다음 학기 임용 여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쉽사리 떨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반대로 시간강사가 근로계약서 작성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이화여대 A강사처럼 학기 중간에 정규직 취업 등의 길을 열어두기 위해서다. 건국대 관계자는 “학기 시작 후 연락도 없이 강의를 그만두는 강사들이 많다”며 “강사들의 소속감과 책임감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근로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B대학 관계자는 “대학 측과 시간강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계약서 작성 의무를 등한시하고, 결국 아무 죄 없는 학생들만 피해를 보는 일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김동애 대학교육정상화투쟁본부 본부장은 “분쟁이 일어나도 명확한 기준이 없어 사용자(학교) 측에 유리하기 때문에 강사 본인을 위해서라도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과부 사태 파악 못해…고용부 대학 조사키로

시간강사들이 대학의 근로기준법 위반을 이유로 고소·고발하면 어떻게 될까. 이 감독관은 “각 대학은 시간강사와 임금, 근로 시간, 퇴직금 등의 내용을 담은 근로계약서를 의무적으로 작성해야 한다”며 “이를 어길 경우 대학 측은 강사당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는 지난해 기준으로 1319명의 시간강사(겸임 교수 등 제외)를 임용했다. 전체 시간강사가 집단으로 소송에 나선다면 서울대 측은 최대 60억원 이상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될 수 있다.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성균관대 등도 각각 1147명, 1181명, 1299명, 717명의 시간강사를 고용하고 있어 이와 관련한 고소·고발이 이어진다면 학생들의 등록금이 벌금으로 쓰이게 될 수도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담당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는 시간강사와 대학 간 근로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교과부 관계자는 기자의 질문에 “시간강사가 근로자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털어놨다.

고용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 “이 정도라면 심각한 수준”이라며 “조만간 대학들을 상대로 근로기준법 위반 여부를 따져볼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섭/양병훈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