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사회라는 게 뭡니까. 간단합니다. 법과 규칙이 지배하는 사회죠.그런데 말만 공정사회지,가장 쉬운 거리질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어요. 점점 더 엉망이에요. "

법조계의 원로인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73)은 인터뷰 내내 법치를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법과 질서를 확립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잘 안되고 있다"는 쓴소리도 쏟아냈다. 그는 "대한민국이 점점 법치와 멀어지고 포퓰리즘과 가까워지는 듯해 안타깝다"는 걱정도 숨기지 않았다. 지난 13일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열린 '대한민국 법률대상'시상식에 전년도 수상자 자격으로 참석한 그를 1시간30분가량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헌법재판소장 퇴임 후 10년 동안 법무법인 율촌 고문으로 있다가 '이젠 물러날 때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 연말에 그만뒀습니다. 아침 6시30분부터 한 시간 정도 수영을 하고 역사책,종교책도 읽습니다. 요청이 들어오면 강연도 나갑니다. 1년에 2~3차례 여행도 가고요. "

▼지난주엔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의 낙마로 시끄러웠습니다.

"법무법인에서 한 달에 1억원을 받은 게 전관예우가 아니냐는 점이 문제가 됐죠.예전부터 재판이나 공소 단계에서 판 · 검사 출신 변호사를 봐주는 걸 전관예우라고 했습니다. 형사사건은 조금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전관예우로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죠."

▼전관예우 없이 한 달에 1억원을 받을 수 있나요.

"그 액수의 성질을 잘 모르겠습니다. 좀 과하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고요. '수십년 동안 의료연구에 종사한 전문의나 의학박사가 인턴,레지던트와 똑같은 수가를 받고 진료한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있어요. 초임 검사 출신이나 초임 변호사보다 판검사 20년간 한 사람이 몇 배 더 받는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물론 돈을 많이 받으면 그 값을 해야 하는 것은 있겠지요. 돈을 많이 받으면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 해도 '난 할 수 없다'는 말을 못합니다. "

▼돈과 명예를 다 가지려 하면 사단이 나던데요.

"미국의 변호사 대니얼 웹스터는 '최선의 법률가는 바르게 살고 부지런히 일하고 가난하게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공직자가 되려면 이런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로스쿨 진학을 생각하는 어떤 학생은 '스포츠카를 모는 변호사'가 꿈이라고 하더군요. 변호사가 타락하면 법의 창녀와 다를 바 없어요. "

▼판사로 재직할 때 봐달라는 선배들 없었나요.

"있었죠,왜 없었겠어요. 예전에 미국이 한국 법원에 미군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이양할 때 한국 법관이 믿을 만한지를 조사했답니다. '한국 판사들은 비교적 돈에는 잘 매수되지 않는다. 제일 약한 게 친구관계다'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해요. 친구한테는 약하다는 얘기겠지요. "

▼청렴한 공직자가 없다고 합니다. 청렴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1973년 사법연수원 교수할 때 제가 젊은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밥을 먹어도 자기 나름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뭐 그걸 가지고 문제 삼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선에서만 하라고.요즘엔 가난이 청렴은 아니에요. "

▼인사청문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나라 청문회 제도에 문제가 많지요. 큰일이에요. 국회 동의를 받는 경우에는 청문회를 통해 밝혀진 건 비공개로 하든지 해서 부결시키면 돼요. 문제가 있으면 동의를 안해주면 되지,후보자에게 망신을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요. 청문회 때문에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경우도 있어요. "

▼청문회까지 갈 수 있는 깨끗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천리마가 없는 게 아니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겠죠.사람이 왜 없어요. 열심히 구하지 않고 가까운 사람만 찾으니까 그렇지요. "

▼무상급식,무상의료가 포퓰리즘 논란을 낳고 있습니다.

"밥 못 먹는 아이들에게 무상급식 해주는 건 좋은데,왜 잘 사는 집안의 아이들까지 다 줍니까. 무상급식 찬성 논리가 위화감 문제라는데,무상급식 하고도 위화감을 안 느끼게 하는 방식이 얼마든지 있어요. 차라리 그 돈으로 밥 굶는 아이들이 학교 안 가는 날 저녁을 먹여야죠.대기업 회장의 손자 밥을 왜 내 세금으로 먹입니까. 포퓰리즘으로 망한 아르헨티나를 보세요. 무상의료는 없는 사람은 무상으로 해주고, 있는 사람은 돈을 많이 내게 하는 대신 조금 편한 서비스를 해주는 게 맞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게 용납이 안 되죠.또 재원은 어떻게 할 겁니까. 중동 국가처럼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세금으로 다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위헌법률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국회 입법과정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위헌성이 있는지에 대해 국회가 사전에 철저히 검토하지 않아서지요. 여야가 적당히 타협한 탓에 법의 앞뒤가 안 맞아요. 여야의 법안이 거두절미하고 합쳐지다 보니 부조화가 발생하는 거지요. "

▼올해 이용훈 대법원장을 비롯해 대법관이 상당수 바뀝니다.

"미국에선 대법관이 종신직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임기제(6년)인데 지금처럼 운영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중 3분의 1은 연임이 가능해야 연속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대법관 구성을 다양화할 필요는 있지만,대법관을 세대교체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

▼소위 '튀는 판결'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념 때문인지 판사의 성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래에 이상한 판결이 많았어요.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무죄 판결이 생각나는데 항소심에서는 다 유죄가 됐잖아요. 골프 내기는 기술로 하는 거니 도박죄가 아니라는 판결도 있던데,그럼 고스톱은 어떻습니까. 기술도 필요하지 않나요(웃음).대법원이 최종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가만히 있더군요. 법관 양심의 자유는 그 사회,그 시대의 보편타당한 가치관에 기초해야죠.학자는 노선에 따라 '김정일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판사는 보편타당해야 합니다. 판사에 따라 결론이 갑으로도 나고 을로도 나면 사법부 신뢰에 문제가 생기죠.상급심에서 시정된다 해도 그때까지 피해는 어떻게 합니까. "

▼법관 재직 시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은 무엇인가요.

"데이비드 슈터 미국 연방대법관이 '절대로 명판결을 할 생각하지마라.명판결이라고 해도 몇 년 지나면 별 게 아니다. 순간순간 충실하라'고 말했어요. 제가 대법관으로 있을 때 생수 시판을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한 게 기억에 남아요. 헌법재판소 시절에는 제대군인 가산점 위헌 결정이 가장 보람있었어요. 욕도 많이 먹었지만 지금도 변함 없이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과외교습을 전면금지하고 형사처벌토록 하는 규정을 위헌결정한 것도 보람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교육제도 전반을 재검토할 계기가 생긴 것 같습니다. "

▼4년차 이명박 정부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요.

"정치는 잘 모르고 언급할 자격도 없는데….아쉬운 점은 지난 두 정부 시절에 법이 조금 흐트러졌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법과 질서를 확립해주기를 기대했는데 그걸 못했어요. 법이라는 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우리 일상생활의 가장 쉬운 법률부터 지키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질서 같은 거요. 대통령이 경찰청장을 불러 한마디 하면 눈에 띄게 달라질 수 있을 텐데,그걸 안하잖아요. "

▼우리사회의 법치 수준은 어떻습니까.

"작은 질서부터 지키는 게 법치의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사면권이 너무 남용된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어요. 사면 남용으로 법원 판결의 권위가 떨어집니다. 대거 사면하면 그해와 다음해에 교통사고 등의 건수가 늘어난다고 하더군요. 양형 조절도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형량이 너무 낮아요. 법치수준을 더 높여야 선진국으로 갑니다. "

대담=고기완 사회부장 / 정리=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