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침몰이 북한 어뢰와 관련 있다는 기사가 해외 신문에 실렸던 데 사실인가요?"

스티븐 로치(64 · Stephen S. Roach)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은 29일 기자를 보자마자 대뜸 천안함 얘기부터 꺼냈다. 전날 미국 뉴욕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기사를 본 모양이었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고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루머가 사실이라면 큰 일"이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원한 비관론자'로 불리는 로치 회장은 이날 서울 여의도 CCMM빌딩 우봉홀에서 기자간담회 직후 바로 옆 바로 옮겨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로치 회장은 앉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콜라와 함께 햄 · 치즈 샌드위치를 5분 만에 해치웠다. 나란히 앉은 기자와 모건스탠리 아시아 직원들은 인터뷰 내내 샌드위치에 손도 대지 못했다. 다음 스케줄로 시간이 빠듯하다던 그는 "함께 먹자"고 권하지도 않았다.

로치 회장은 걱정이 많은 비관론자답게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부터 화제에 올려 한국 경제의 빠른 회복에 대한 평가를 기대했던 기자를 무색케 했다. 하지만 그는 "난 아시아의 열렬한 팬"이라며 금세 밝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중국과 한국이 아시아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고 강조하는 대목에선 활기까지 느껴졌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그동안 남북 간 긴장상황이 여러차례 되풀이됐지만 한국 정부가 잘 대처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화 도중 '비관론자'(pessimist)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피식'하는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비관론자라는 호칭이 이젠 지겹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대신 '현실주의자'(realist)라고 불러 달라고 주문했다.

▶지난해 10월 한국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세계경제는 V자형으로 반등하기 어렵다"고 예언했었다. 하지만 이후 글로벌 경기는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며 증시도 대폭 올랐다. 당시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하나.

"작년 하반기 이후 글로벌 증시의 반등은 일시적인 것이다. 재고 조정이 빠르게 이뤄졌고 각국의 경기부양책 등 단기적으로 주가를 끌어올릴 모멘텀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반등은 지속되기 어렵다. 세계 경제는 하반기부터 국가별,분야별로 분화할 것이다. V자형 반등을 너무 믿는 투자자는 곧 실망할 수 있다. "

▶전날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연방기금 금리를 현재 수준에서 '상당 기간'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한국 중국 등 주요 국가들도 출구전략 시점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FOMC의 금리동결 결정은 명백한 실수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저금리에 집착하다 자산버블(거품)을 키워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했던 잘못을 지금도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 연 0~0.25%대의 연방기금 금리는 위기상황에나 어울릴 법한 수준이다. 지금은 긴급상황을 벗어났다. 위기 이전 수준으로 갑작스럽게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미약하게나마 진행 중인 경기회복에 맞춰 금리를 조정해야 한다. 시기를 놓치면 감당하기 힘든 사태가 올 수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인플레를 감안하면 당장 금리를 연 2%대로 올려야 한다. 그래도 실질금리는 마이너스 수준이다. "

▶S&P가 그리스 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의 신용등급까지 내렸다. 유로존이 새로운 금융위기를 불러올 수 있나.

"그리스 재정위기는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접국으로의 전염은 이미 시작됐다. 이번 사태는 일부 국가에 한정된 것도,일회성으로 끝날 성격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 사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경기확장기 때 재정정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불황기에 문제점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확대해 놓은 재정을 위기가 닥친 후에 축소하기는 매우 어렵다. 현재 남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과거 수차례 되풀이됐던 금융위기 이후 시장이 진정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전형적인 증상이다. "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승자 프리미엄'을 누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어떻게 평가하나.

"과거 한국 제품은 일본제보다 품질이 떨어지면서 중국제보다 가격은 비싼,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제품은 합리적인 가격에 품질도 좋다는 인식을 심어줘 상황을 역전시켰다.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한국 점유율은 2007년 말 22%에서 작년 3분기에는 33%로 급상승했다. 10년 전 만해도 해외에서 삼성전자는 값싼 제품을 만드는 회사로 인식됐다. 지난해 인터브랜드(브랜드 컨설팅업체)의 조사를 보면 베스트 글로벌 브랜드에서 삼성전자는 19위로 뛰어 올랐다. 100위권 기업 중에서 최근 10년간 가장 많이 순위가 상승한 기업이다. 현대자동차 LG전자 등도 대단한 성장세다. 일각에선 고환율 덕분에 수출이 늘었다고 하지만 이는 일부 요인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기술 경쟁력이 높아졌고 수출 지역을 신흥시장으로 다변화한 덕분이다. "

▶아시아 국가들은 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문제라고 일관되게 지적해왔는데.

"아시아 지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소비 비중은 1980년 65%에서 2008년 45%까지 떨어진 반면 수출 비중은 17%에서 40%로 올랐다. 수출 의존도가 너무 높다. 한국 중국 등 수출주도형 성장모델은 그동안 미국의 과잉소비로 유지돼 왔지만 이제는 변화가 불가피하다. 금융위기 이후 급격히 위축된 미국의 소비는 향후 2~3년 간 빠르게 회복하기 어렵다. 중국 인도의 소비가 늘겠지만 미국의 감소분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아시아가 세계경제의 성장엔진이 되려면 내수를 키워야 한다. "

▶한국과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 체제는 수출이 필수적이란 지적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한국은 중국처럼 방대한 내수 배경을 가진 나라와는 다르다. 수출도 병행해야 한다. 특히 중국이 그동안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왔지만 앞으로는 내수 부양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소비확대는 한국과 같은 인접국에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

▶저서 《넥스트 아시아》에선 중국의 성장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2007년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직후 불균형,불안정,부조화,지속성 문제 등 4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나친 수출 의존도,도농간 소득격차,환경오염과 파괴,천연자원의 남용,부동산 거품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중국 정부가 과거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적절한 정책으로 잘 해결해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

▶위안화 절상을 놓고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만만치 않다.

"경제 불균형을 통화 재평가로 해결하려는 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1980년대 말 일본이 과도한 경상수지 흑자 문제를 풀기 위해 엔화 재평가에 나섰지만 효과를 못 봤다. 2002년부터 지속된 달러 약세 역시 미국의 재정적자와 경상적자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중국의 불균형 문제는 민간소비 진작을 통해 풀어야 한다. 위안화 가치를 의도적으로 조절해서 될 일이 아니다. "

▶은행세가 최근 이슈로 부각됐다.

"금융개혁과 맞물리면서 미 의회에서도 중요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결국 은행의 적정 자본비율에 대한 판단이 핵심이다. 과거 경험상 경기 호황기에 자본비율을 높여놓으면 경기 하강기에 쿠션 역할을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세금보다는 규제 강화를 통해 적정한 비율을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관론자로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스스로를 비관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안에 따라 낙관적인 견해를 내놓은 경우도 많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사실에 기초해 가장 적정한 해결 방안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다. 지난 10여년 간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많이 제시했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의 주장도 중요하다. 최근 7개월 간 5개국 중앙은행이 주관한 통화정책 세미나에 강연자로 초청받았다. 활발한 토론을 통해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여러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코스피지수는 더 오를 수 있나. 한국과 관련된 금융상품에 투자한 적이 있거나 한국이나 중국 주식이 편입된 펀드에 가입하지는 않았나.

"구체적인 시장 전망은 '노 코멘트'다. 한국 투자는 '한국경제신문 주식'이 전부다(웃음).물론 농담이다. 개인적인 투자내역을 얘기하긴 곤란하다. "

▶《넥스트 아시아》는 지난해 9월 출간 이후 아시아에서 중국어판에 이어 한국어판이 두번째로 나왔다. 어떤 독자를 염두에 뒀나.

"투자자와 정책 입안자들이 1차 타깃이다. 하지만 경제나 비즈니스에 관련된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관심있게 읽어봤으면 좋겠다. 경제서적이지만 추리소설만큼 재미도 있다. 책을 손에 잡으면 밤새 읽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이 책의 영어판과 중국어판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전액 뉴욕의 아론다이아몬드에이즈연구센터와 상하이 차이나유럽국제비즈니스스쿨에 절반씩 기부된다. 개인적으로 보건과 교육에 관심이 많아 인연이 있는 연구소와 학교에 수익금을 보내고 있다."

글=박해영/문혜정/사진=허문찬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