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렇게 환매하지 말라고 했는데 고집을 부리더니만….요즘 후회가 막심하답니다. "

금융투자협회의 한 간부가 최근 주식형펀드 대량 환매 사태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 불쑥 던진 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0월 미국 월가 금융인이 노숙자로 전락한 실상을 TV로 지켜본 이 간부의 아내는 적립식 펀드 환매를 결심했다. 업계에서 '펀드 박사'로 통하는 그였지만 무작정 환매하겠다는 아내를 말리진 못했다. 그는 "'공포'로 인해 바닥에서 환매하고 '탐욕'으로 고점에 뛰어드는 투자자들의 심리가 조금은 이해가 간다"고 씁쓸해 했다.

코스피지수가 사상 최고였던 2007년 10월에 가입한 동갑내기(39) 적립식 투자자 이광태씨와 지준호씨의 사례는 공포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수익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매달 꾸준히 납입하고 있는 이씨는 국내 적립식 펀드에서 지난 주말까지 16.19%의 수익을 냈다. 반면 코스피지수 1000선이 깨진 2008년 11월부터 납입을 중단한 지씨는 현재 수익률이 2.14%로 겨우 본전만 회복한 수준이다. 그나마 당시 원금의 33% 이상 손해보고 돈을 빼려다 "원금이라도 되면 찾으라"는 증권사 직원의 말을 듣고 그대로 둔 게 위안거리다.

시황 전망이 어둡다고 적립식 펀드 납입을 중단하거나 돈을 빼는 것은 적립식 투자의 기본원리를 망각한 행동이라고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지적한다. 나중에 주가가 반등해 적립식 펀드가 수익을 낼 수 있는 '요술램프'의 뚜껑을 닫아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적립식 펀드 환매 결정은 목표 수익률을 충분히 달성했거나 펀드 선택이 잘못된 경우에나 고려할 일이다.

◆반토막 러시아펀드도 적립식은 수익 내

19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월 적립식 펀드 잔액은 69조원,계좌 수는 1160만개였다. 1월까지 잔액은 8개월 연속,계좌 수는 19개월 연속 감소하다 잠시 회복된 것이다. 아직 3월 집계치가 나오지 않았지만 코스피지수가 재차 1700선을 돌파하면서 또다시 적립식 펀드 잔액이 급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금을 찾거나 차익을 실현하려는 욕구가 높아진 탓이다.

펀드평가회사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적립식으로 꾸준히 넣었다면 2007년 10월 말 코스피지수 사상 최고치에 가입한 국내 주식형펀드 투자자들도 15% 안팎의 수익을 내고 있다. 해외 펀드도 상황은 비슷하다. 해외 펀드 투자 바람이 분 2007년 이후 월납입 적립식 가입자는 대부분 수익이 난 상태다. 증시는 2년 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어도 '시기의 분산'을 통해 주식의 평균 매입단가를 낮춘 적립식 효과 덕이다.


대표적인 러시아펀드인 'JP모간러시아A'는 지난 2년간 55.86%나 손실을 보고 있다. 하지만 2년 전인 2008년 4월 이 펀드에 적립식으로 가입한 투자자는 39.38%의 높은 수익을 내고 있다. 해외 펀드의 쌍두마차인 '신한BNPP봉쥬르차이나2(종류A)'와 '슈로더브릭스E' 역시 이 기간 적립식으로 꼬박꼬박 넣었다면 누적 수익률이 18%를 넘는다. 서동필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적립식 펀드의 달콤한 과실은 꾸준히 납입하며 고통을 이겨낸 투자자에게만 주어진다"고 강조했다.

◆적립식은 장기 투자의 핵심

적립식 펀드는 늘 시장에 머물면서도 주가 수준에 대한 위험 부담을 줄여준다.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더 싼 가격에 매입해 평균 매입단가를 낮추기 때문이다. 증시를 떠나 있다가 주가 반등기에 다시 들어갈 기회를 놓치는 문제도 해소된다.

증시에서 수익률은 대개 단기간에 좌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S&P500지수를 기준으로 1997년부터 5년(1264일)간 장기 투자 수익률은 연평균 10.7%였다. 하지만 이 기간에 가장 많이 오른 10일을 놓쳤을 경우 수익률은 1.55%로 떨어지고 30일을 놓치면 거꾸로 9.77% 손실을 본 것으로 조사됐다. 시장에 머물러 있어야 기회를 살릴 수 있단 얘기다.

강신우 한국투신운용 부사장은 "적립식 투자는 주가 수준이나 시기에 따라 넣을지 말지를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선진국 사례를 보면 장기적으로 증시는 반등해 언제든 수익을 내고 환매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다만 적립식 펀드에 대한 꾸준한 관리는 필요하다. 장기간 투자로 적립된 투자 규모가 커지면 매월 적립하는 효과가 미미해 거치식 투자와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잉크 한방울을 찻잔에 떨어뜨린 것과 양동이에 떨어뜨린 것의 차이를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투자 지역 지나친 쏠림은 문제

적립식을 통해 투자 시점을 나누는 것 못지않게 투자 대상의 분산도 중요하다. 금투협에 따르면 해외 주식형펀드 설정액 47조원 중 홍콩H주(홍콩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주식)에 투자하는 중국펀드는 18조원에 이른다. 중국 본토펀드(1조원)까지 합치면 전체의 40%에 달한다. 이와 함께 아시아퍼시픽(일본 제외 · 3조2400억원) 친디아(2조7000억원) 등 투자자 대부분의 자산이 아시아 이머징 국가에 편중돼 있다.

특정 지역의 지나친 쏠림은 예기치 못한 투자 위험을 키울 수 있다. 금투협은 해외 투자 펀드의 특정 지역 편중을 방지하기 위한 모범규준을 제정하는 등 제도 개선을 준비 중이다.

전문가들은 주가가 반등한 시점을 이용해 자신의 자산(포트폴리오)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강창희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장은 "각자의 주식형과 채권형,유동성 자산의 적정 비중을 염두에 두고 주가 상승으로 인해 주식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졌을 경우에는 초과분을 채권형이나 유동성 자산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정환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