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차를 2명의 다른 운전자가 번갈아 운전한다. 같은 거리를 누가 더 연료를 적게 쓰면서 운전할 지를 가리는 흥미진진한 '맞대결'이다. 장소는 독일 하노버 공항 인근 도심, '출전선수'는 한국과 독일에서 각 1명씩이다.

대결은 우연히 성사됐다. 폭스바겐은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5일(현지시간)까지 독일 하노버에서 세계 각국의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친환경 기술인 '블루모션'을 적용한 신차들을 공개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마지막 날인 지난 5일, 한국을 포함한 러시아, 아일랜드, 체코 등에서 초대된 자동차 기자단은 신차를 시승한 후 폭스바겐의 차량 전문가들을 태운 채 '연비운전 체험'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한국 기자단의 제의로 즉석에서 한국과 독일 측 2명의 운전자가 '연비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한국 측 대표선수는 운전경력 16년차의 자동차 전문기자 권용주(오토타임즈 기자) 씨.

독일 측에서는 폭스바겐 본사에서 근무하는 차량 전문가 토마스 크라제 씨다. 한 회사의 차량 전문가라는 직함을 가진 만큼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다.

승부를 벌이는 차량은 '해치백의 교과서'라 불리는 인기모델 ‘골프 2.0 TDI'다. 수동변속기가 달린 모델로, 폭스바겐의 친환경 기술인 '블루모션'을 부분 적용한 모델이다. 이 차에 전문 측정장치를 장착하고 2명의 운전자가 번갈아가며 운전하는 방식으로 대결이 이뤄졌다.

우선 권용주 기자의 차례다. 본인을 제외한 동승자 3명을 태우고 하노버 도심 20여km를 달렸다. 수동변속기 차량을 운전하는 솜씨가 범상치 않다. 기어를 바꿔가며 익숙하지 않을 법한 독일 도심을 멋지게 달린다.

현지인들의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는 오후 3시가 넘자 거리를 달리는 차량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권 기자는 갑작스러운 정체 탓인지 앞차와의 거리가 벌어진다싶으면 가속 페달을 밟아 바짝 붙이는 방식으로 운전한다.

깊게 가속페달을 밟자 측정장치에 표시되는 연비는 조금씩 낮아진다. 엔진 회전수를 나타내는 RPM 계기반의 붉은 바늘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주위에서 말을 걸어보지만 뒤에서 다가오는 차가 적잖이 신경 쓰이는 눈치다.

대결이 시작됐던 독일 알토프 호텔로 돌아와서 차를 세우고 측정장치를 봤다. 연비는 100km당 6.2ℓ, ℓ당 16.12km를 주행한 셈이다.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수동변속기가 달린, 처음 몰아보는 차로 낯설고 혼잡한 도심을 주행한 걸 감안하면 훌륭한 연비다.

평균속도는 시속 34km, 배출한 이산화탄소(Co2)는 1km당 162g이다. 엔진회전수의 평균치는 1281RPM, 운행 소요시간은 13분 4초였다.

이제 독일 대표의 차례다. 사실 크라제 씨는 한국 기자단의 '대결요청'에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었다. 그러나 막상 승부가 시작되자 시종일관 보이던 미소는 사라지고 냉철한 자세로 대결에 임했다.

운전대를 잡은 크라제 씨는 자신의 몸에 맞게 운전석을 조정하고 백미러를 움직인다. 운전대 각도의 점검까지 꼼꼼히 마친 후 조심스레 시동을 건다. '한 번 해보자'라는 결의가 느껴진다.

기어를 움직이는 손끝이 자연스럽다. '이 차를 잘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노버 현지 주민인만큼 도로 사정도 훤하다. 권 기자로서는 약간의 불리함을 안을 수밖에 없는 대결이다.

'차량 전문가'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만큼 운전하는 품새가 남다르다. 차량에 어느정도 속도가 붙으면 금세 기어를 중립으로 바꾸고는 제동페달로 앞차와의 거리를 조절한다. 극도로 연료를 아끼기 위한 운전법이다. 다만 체감속도가 느려 동승자들로서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는 차량의 흐름을 차분히 읽었다. 신호가 언제 떨어질 지를 가늠하며 가속과 제동을 최대한 삼가했다. 측정장치에 표시된 연료 사용치는 눈에 띄게 내려갔다. 그만큼 연료를 덜 쓰면서 효율적인 운전을 하는 것이다. 동승자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감탄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여유를 찾은 듯 크라제 씨는 이런저런 설명을 한다. "엔진 회전수가 1500을 넘기기 전에 기어를 바꿔야 한다" "교통신호에 막힐 듯 하면 차량 속도를 조절해라" "급히 가속을 하면 연비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 등 절약 운전 상식들이다.

'상식'을 철저히 지킨 운전을 보여준 크라제 씨의 성적은 어땠을까. 측정장치에 표시된 연료소비량은 100km당 4.53ℓ, ℓ당 22.07km에 달하는 놀라운 연비를 달성했다. 평균속도는 시속 33.9km로 권 기자가 주행했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도로의 흐름을 잘 읽어낸 덕분이다.

동승자가 답답할 정도로 '여유로웠던' 그는 지정 코스를 13분 6초에 돌았다. 막상 주행을 마치고 보니 권 기자가 운전했을 때와 단 2초만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엔진의 평균 회전수는 1111RPM, 자로 잰 듯한 숫자가 나왔다. Co2 배출량은 1km당 118g으로 줄었다.

'실력'을 겨루기보다는 '재미'를 강조한 즉석 승부였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운전습관이 차량의 연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승자의 운전은 여유로움에서 시작됐다. 뒷차의 접근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제 속도로 달린 게 승리의 밑거름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운전하면 어떨까', 잠시 상상해 봤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귓가를 때릴 뒷차의 경적소리였다. 앞차와의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다른 차가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서울의 혼잡한 도심길도 생각났다. '모두가 여유를 가지면 기름값 좀 아낄텐데'라는 아쉬움이 자연스레 생겼다.

차량을 몰고 차고로 들어가는 크라제 씨에게 "다음엔 한국에서 붙어보자"고 말했다. 그는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하노버(독일)=한경닷컴 이진석 기자 ge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