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초 어느 날 재정경제부 세제실장 자리.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당시 세제실장이던 최경수 현대증권 사장은 전화를 집어들었다. 장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캐물었다. "나도 모르게 공직자 신분으로 어떻게 야당 총재 특보 노릇을 했어?"

날벼락 같은 얘기였다. 2002년 말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 정부의 고위 공직자 인사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차관급 인사에서 하마평이 무성했던 최 실장에겐 난데없이 터진 메가톤급 악재였다.

◆'TK 3인방' 모함에 시련

사연은 이랬다. 청와대에 "최경수는 야당 총재의 특보로 뛴 'TK 3인방 관료'라서 새 정부의 요직을 맡기엔 부적절한 인물"이라는 투서가 날아든 것이다. '야당 총재 특보'에 'TK 3인방'이라니,본인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모함이었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30년 동안 지켜온 관료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는 소리였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경찰 국가정보원 등을 통해 투서의 사실 여부를 캤다. 밝혀진 것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 몫이던 국회 재경위원장과 점심식사를 했다는 정도였다. 업무 성격상 세제실장이 세법 개정안 설명을 위해 재경위원장을 만난 것은 당연했고,이를 제외한다면 오해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결국 '무혐의' 판정이 났다.

하지만 새로 난 인사 발령(지방국세청장)은 세제실장을 역임한 사람에겐 수모에 가까운 좌천인사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배 관료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 "차라리 때려 차 뿌라"며 대신 억울해했다.

과천 관가에선 당시 인사 조치를 관료 사회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치욕인사' 가운데 하나로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억울함과 분노를 이겨낸 비법을 물었다. 최 사장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내가 세운 원칙만 매일 곱씹었다"였다. 김천세무서 총무과장(사무관)을 시작으로 재정경제부 세제실장에 오르기까지 '조세통'으로 성장하며,한시도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원칙에 소홀했던 적이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통상압력 막아 소주값 지켜

1999년 주류세 협상에선 '최선을 다한' 공직자 최경수가 통상압력을 막아냈다. 그는 재경부 재산소비세국장으로 유럽연합(EU) 미국 등과 위스키 및 소주의 세율에 대한 협상을 벌였다. EU와 미국은 자신들이 수출하는 알콜도수 40~50도짜리 위스키에 높은 세금을 물리는 것처럼 20도가 넘는 소주에도 1도당 얼마씩 같은 세금을 적용하는 종량세 방식을 채택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한국이 자국 시장 보호를 위해 소주와 양주에 세금 매기는 방식을 다르게 해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을 위반했다며 압박했다. 그런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한 병에 600원 정도였던 소주값이 20배 이상 뛰는 심각한 상황이 우려됐다. 최경수 국장은 협상단을 꾸려 벨기에 브뤼셀과 미국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당시 재경부 차관은 "협상에 나가서 양보한다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말라"고 엄포를 놨다.

양주 회사들의 로비에 한껏 격앙된 EU와 미국 협상단은 술 도수대로 같은 세금을 물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최 국장은 "한국은 서민을 위해 대중주엔 싸게,원가가 비싼 술엔 높게 세금을 매겨왔다"며 "이런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상대방의 관행을 따르라는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원칙론으로 맞섰다.

미국 협상 대표는 둘만의 단독 협상을 요청해 이번 건을 양보해주면 다른 건들을 도와주겠다고 구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원칙 고수는 흔들리지 않았고,우여곡절 끝에 양주와 소주의 세율만 동일하게 조정하는 선에서 협상이 마무리됐다. 소주값은 800원으로 오르는 데 그쳤다.


소탈하게,꼼꼼하게,그리고 열심히

최 사장의 지인(知人)들은 그를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소탈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개 있다. 서울대 지리학과 재학 시절 워커를 신고 검은색 점퍼에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녔다. 어느 날 버스에서 비슷한 차림새의 한 남자가 대뜸 "먼저 하시죠"라며 말을 건넸다.

낯선 사람의 이상한 양보에 어리둥절해하자 그 남자는 "그럼 제가 먼저"라며 가방에서 생활용품 몇 가지를 꺼내더니 승객들에게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라며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자신과 행색이 비슷한 최 사장을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해 '양보의 미덕'을 배풀려 했던 것이다. 사무관으로 김천세무서에 첫 출근하던 날엔 직원들이 월부책 외판원으로 오해해 "책 안삽니다. 나가세요"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명문대생이나 고시 붙은 젊은 사무관에게 어울릴 만한 옷차림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꼼꼼하게 열심히'도 그의 성품으로 꼽힌다. 함께 일했던 후배 관료들은 "정말 꼼꼼한 분이다. 모시고 일할 때 고생 좀 했다"고 입을 모은다. 저녁 자리에서 술 한잔을 걸친 날에도 반드시 사무실에 다시 들러 업무를 챙기고 집에 갔다. 경북대 교수인 부인과 오랫동안 주말부부로 지내다보니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꼼꼼하게 열심히 일한 만큼 아랫사람들의 불만이 컸을 법도 한데 사정은 달랐다. "열심히 일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을 수는 있지만,적어도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게 하겠다"는 자신만의 조직 운영 방침을 지킨 덕분이다.

이런 방침은 뛰어난 업무 성과로 이어져 2003년 말엔 차관급인 조달청장에 올랐다. 조달청에 민간기업과 같은 비즈니스 마인드를 불어넣어 2004년 '정부업무평가 우수기관''정부혁신평가 최우수기관' 등에 잇따라 뽑히도록 했다.


영업형 CEO로 변신

조달청장을 마치고 계명대 세무학과 교수로 일하던 그는 지난해 4월 현대증권 사장에 취임했다. 공무원에서 교수로,다시 증권사 사장으로 세 번째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취임하자마자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부실 사태가 불거지면서 시험대에 올랐다.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자 증시는 연일 폭락했고,주가 전광판은 시퍼렇게 물들었다. 사장을 맡고 나서 회사가 6개월 정도 벌어들인 돈이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출근하기가 두려운 날들이 이어졌다.

최 사장은 다시 힘을 냈다. 회사를 위해 철저하게 영업형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했다. 친구나 선 · 후배를 만날 때마다 귀찮아할 정도로 펀드나 종합자산관리계좌(CMA)에 들라고 권했다. 유상증자,회사채 발행 등 투자은행(IB) 업무를 따야 할 때는 공직생활에서 쌓은 인맥을 총동원했다. '장사꾼'이 다 돼 아쉬운 소리를 막힘없이 늘어놓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놀랄 때도 많았다. 이처럼 사장부터 영업맨으로 뛰다보니 현대증권은 지난해 주식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도 위탁영업 수수료 수익이 업계 2위를 차지했다. 올 상반기엔 기업공개(IPO) 주관 실적 1위에 오르는 등 괄목할 만한 영업실적을 올렸다.

이런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최 사장은 앞으로도 현대증권 2600명 임 · 직원들을 엄하게 독려하는 시어머니 노릇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잔소리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임직원들에게 너무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CEO가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엔 "나무를 봐야,그것도 꼼꼼하게 살펴야 숲을 볼 수 있다"고 응수한다.

이처럼 자신의 경영방침을 확고하게 강조하는 것은 세 번째 사는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서다. 그 꿈은 "현대증권을 진짜 단단한 회사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다른 증권사들처럼 주식 중개수수료에 의존해선 요동치는 증시에서 안정적으로 실적을 올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IB는 물론 자산관리 자기자본투자(PI) 등으로 수익원을 다변화할 구상이다.

장경영/강현우 기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