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우면산 자락에 들어선 '예술의 전당'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서울시민 대부분은 예술의 전당이 세종문화회관이나 남산의 국립극장과 같은 콘서트나 공연을 위한 음악홀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예술의 전당에 5개의 음악 전용극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5개의 극장? 예술의 전당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문을 열었나? 물론 아니다. 예술의 전당에는 오페라,연극,공연리허설,오케스트라,채임버뮤직 같은 서로 다른 공연양식에 맞춰 설계된 5개의 전용극장이 들어있다. 음악 전용공간 이외에도 서예박물관,한가람미술관,디자인미술관 등을 포함한 '시각예술 전시장'도 함께 갖춰졌다.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복합예술문화공간'이다.

서울시는 최근 서울을 대표하는 '디자인 자산 51가지'를 선정했다. 당연히 예술의 전당도 포함됐다. 서울의 디자인 자산은 건축 · 문화적인 유형 가치와 한국예술을 대표하는 무형 문화적 가치를 동시에 가진 것을 기준으로 선정됐다.

예술의 전당이 착공된 것은 25년 전인 1984년이다. 이후 1988년 음악당과 서울서예박물관이 문을 열었고,핵심시설인 오페라하우스는 1993년 개관했다. 어느 새 16년이 흘렀지만 요즘처럼 예술의 전당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착공 당시인 80년대는 사실 국민들이 고급 문화예술공연을 즐길 만큼 생활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88올림픽이란 국제행사를 경험하면서 문화적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한국문화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고,동시에 그동안 구경할 수 없었던 세계의 유명 공연작품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로 인해 예술의 전당은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알려진 문화예술공간의 반열에 올랐다.

국내 대학들은 앞다퉈 뮤지컬 공연학과를 신설했으며,시중에는 수많은 공연기획사가 등장하는 등 국내 문화인프라도 크게 확대됐다. 뉴욕 브로드웨이의 공연작들도 끊임없이 들어와 국내 무대를 장식했고 관객들은 환호했다. 그만큼 공연예술의 저변이 급격히 확대됐다.

이 같은 상황변화는 복합예술공간으로 설계된 예술의 전당의 가치를 한껏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때문에 요즘 예술의 전당의 건축적 가치가 탄생 당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새삼 부각되고 있다.

예술의 전당은 공연관람 기능을 빼고도 소음과 찌든 공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신선한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남부순환도로변에 있는 예술의 전당의 전체적인 외관은 중세도시의 성벽 같은 화강암벽으로 둘러싸여 다소 경직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입구를 통해 중앙광장에 들어서기만 하면 밖에서와는 전혀 딴판이다. 우면산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산책로,대로변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널찍한 가로가 한 눈에 펼쳐지면서 아늑하고 상쾌한 느낌이 온 몸을 휘감는다.

예술의 전당을 설계한 김석철 전 명지대 건축대학장은 예술의 전당이 하나의 작은 도시이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거대한 단일 건물군의 모양을 탈피했다. 개별적 건물들을 잘게 나누고 사이사이에 길과 광장을 배치했다. 이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작은 도시가 됐다. 우리 전통도시에서 흔히 보여지는 다정다감한 배치다.

예술의 전당은 또한 굳이 공연관람 목적의 방문이 아닌 사람에게도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는 예술공연 공간이 반드시 특정계층을 위한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설계자의 철학이 실행으로 옮겨진 결과다.

오페라극장 내의 메인 로비는 3개 극장으로 통하는 입구이자 예술의 전당의 중심공간이다. 여기도 항상 대중에게 열린공간이다. 오페라하우스에 들어가지 않아도 부담없이 다양한 전시물과 공간산책을 할 수 있다. 로비에서는 밖을 구경하는 것도 잔잔한 재미다. 자연스럽게 전시된 조형 예술작품들이 건물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짜여진 공간구성 때문이다. 오페라극장을 나오면 우면산과 예술의 전당 사이로 조성된 산책로는 방문객들에게 사색의 즐거움을 준다.

지어질 때만 해도 서울 외곽 변두리에 지어졌다며 타박을 받았던 예술의 전당.그러나 지금은 어느 새 서울 중심권으로 탈바꿈돼버렸고,서울시민에게 값진 마음의 양식을 공급하는 양식처가 됐다. 복잡하고 바쁜 일상이지만 잠시 뒤로 하고 일부러 한번 찾아가볼 만하다. 다시 보는 예술의 전당의 신선한 느낌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남훈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