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근의 史史로운 이야기] 계찰의 義, 양공의 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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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약속을 지킨 아름다운 이야기(佳話)의 으뜸은 춘추시대 오(吳)의 공자 계찰(季札, BC 576~484년)의 고사일 것이다.
부왕 수몽이 넷째 아들의 총명함을 사서 후계자로 점찍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연릉의 시골 제후로 자족한 인물이다.
계찰이 순회대사로 중원을 순방중에 서(徐)국을 지났다. 서의 군주는 계찰이 차고 있는 보검이 마음에 들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계찰은 그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대사의 임무가 남아있으므로 끌러주지 못했다.
귀국길에 다시 들렀을 때 서의 군주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계찰은 보검을 끌러 그의 무덤에 걸어주고는 발길을 돌렸다. "받을 상대가 이미 죽었는데 또 누구한테 주는 것입니까?" 종자가 묻자 계찰이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 애초 내 마음에 주기로 결정한 것인데, 그가 죽었다고 해서 마음을 바꿔서야 되겠는가. (不然. 始吾心已許之, 豈以死倍吾心哉.)" <사기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계찰이 보검을 걸어주다(季札繫劍)'는 에피소드는 그저 약속을 잘 지킨 것 이상의 뜻이 있다. 구두로 약속하거나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닌 이심전심의 약조다.
그것을 계찰은 미련스럽게도 실천했고, 더구나 상대가 이젠 이승의 사람이 아닌데도 신의를 다했다. 그래서 사마천도 찬(贊)하기를 '작은 언행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의 맑고 흐림을 안다(見微而知淸濁)'고 하면서 계찰이 보여준 의로움의 무한한 경지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100년 정도 앞서 살았던 송(宋)의 양공(襄公)은 큰 약속을 지키다가 망신당한 경우다. 송은 은(殷)의 후손이다. 망국 300여년이 지나 국운을 회복한 양공은 마침내 대국 초(楚)와 강을 사이에 두고 패권을 다퉜다.
초군이 먼저 강을 건너자 공자 목이(目夷)가 적이 도하 중일 때와 진형을 미처 갖추지 못했을 때 공격하자고 두 차례나 건의했으나, 양공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군자는 곤경에 빠진 이를 치지 않는다(君子不困人於 )'는게 이유였다. 결국 초에 참패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송 양공의 어리석은 인정(宋襄之仁)'이라고 불러 웃음거리로 삼았다. <십팔사략>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1년 후 죽게 되는 양공은 쓸데없는 동정을 베풀다가 화를 자초한 어리석은 군주의 사례로 회자된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당시 대규모 전투의 국제 룰은 정규전이었다. 진형을 갖추고 개전 예식을 다한 다음 북소리와 함께 먼저 기병이 나서고 다음은 전차, 보병 순으로 전투가 전개됐다. 기습이나 역습은 양공의 소신대로 '군자가 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망국의 후손은 사실과 무관하게 놀림감이 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고사 중에서 '토끼가 나무에 걸리기만 기다리다(守株待兎)' 나 조장(助長) 같은 우둔함의 주인공은 대개가 송인이다. 양공은 당시 더 큰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규범을 지킨 대인의 풍모를 드러낸 것이지만, 승자들이 쓰는 역사는 그를 어리석음의 표본으로 희화화해버리고 말았다.
훗날 양공의 배려는 '필부들이나 베푸는 것(匹夫之仁)'이라고까지 폄하되는데, 그것은 이미 인간사에 갖춰야 할 예(禮)라는 것이 입에 발린 구호가 된 다음의 일이다.
요즘 여의도 의원들이 약속을 해놓고 하루도 안돼 딴말한다고 온갖 비난을 받고 있다. 국민의 대표들이 초등학생처럼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도장 찍으면서 다짐했다는데, 아무런 보람이 없으니 어린이들이 다 놀랄 일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두고 '극적 합의' 운운하는 것도 문제지만, 합의장에서 등을 돌리자마자 '미안하지만 득을 본 건 우리, 너희는 손해'라고 손익계산서를 들추는 무신경이 더욱 놀랍다.
서로 윈-윈(win-win)했다고 하는 최소한의 수사학적 배려도 없이 상대방을 자극해 대니, 군자인들 그 약속이 예뻐보일 턱이 없을 것이다.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
부왕 수몽이 넷째 아들의 총명함을 사서 후계자로 점찍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연릉의 시골 제후로 자족한 인물이다.
계찰이 순회대사로 중원을 순방중에 서(徐)국을 지났다. 서의 군주는 계찰이 차고 있는 보검이 마음에 들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계찰은 그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대사의 임무가 남아있으므로 끌러주지 못했다.
귀국길에 다시 들렀을 때 서의 군주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계찰은 보검을 끌러 그의 무덤에 걸어주고는 발길을 돌렸다. "받을 상대가 이미 죽었는데 또 누구한테 주는 것입니까?" 종자가 묻자 계찰이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 애초 내 마음에 주기로 결정한 것인데, 그가 죽었다고 해서 마음을 바꿔서야 되겠는가. (不然. 始吾心已許之, 豈以死倍吾心哉.)" <사기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계찰이 보검을 걸어주다(季札繫劍)'는 에피소드는 그저 약속을 잘 지킨 것 이상의 뜻이 있다. 구두로 약속하거나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닌 이심전심의 약조다.
그것을 계찰은 미련스럽게도 실천했고, 더구나 상대가 이젠 이승의 사람이 아닌데도 신의를 다했다. 그래서 사마천도 찬(贊)하기를 '작은 언행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의 맑고 흐림을 안다(見微而知淸濁)'고 하면서 계찰이 보여준 의로움의 무한한 경지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100년 정도 앞서 살았던 송(宋)의 양공(襄公)은 큰 약속을 지키다가 망신당한 경우다. 송은 은(殷)의 후손이다. 망국 300여년이 지나 국운을 회복한 양공은 마침내 대국 초(楚)와 강을 사이에 두고 패권을 다퉜다.
초군이 먼저 강을 건너자 공자 목이(目夷)가 적이 도하 중일 때와 진형을 미처 갖추지 못했을 때 공격하자고 두 차례나 건의했으나, 양공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군자는 곤경에 빠진 이를 치지 않는다(君子不困人於 )'는게 이유였다. 결국 초에 참패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송 양공의 어리석은 인정(宋襄之仁)'이라고 불러 웃음거리로 삼았다. <십팔사략>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1년 후 죽게 되는 양공은 쓸데없는 동정을 베풀다가 화를 자초한 어리석은 군주의 사례로 회자된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당시 대규모 전투의 국제 룰은 정규전이었다. 진형을 갖추고 개전 예식을 다한 다음 북소리와 함께 먼저 기병이 나서고 다음은 전차, 보병 순으로 전투가 전개됐다. 기습이나 역습은 양공의 소신대로 '군자가 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망국의 후손은 사실과 무관하게 놀림감이 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고사 중에서 '토끼가 나무에 걸리기만 기다리다(守株待兎)' 나 조장(助長) 같은 우둔함의 주인공은 대개가 송인이다. 양공은 당시 더 큰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규범을 지킨 대인의 풍모를 드러낸 것이지만, 승자들이 쓰는 역사는 그를 어리석음의 표본으로 희화화해버리고 말았다.
훗날 양공의 배려는 '필부들이나 베푸는 것(匹夫之仁)'이라고까지 폄하되는데, 그것은 이미 인간사에 갖춰야 할 예(禮)라는 것이 입에 발린 구호가 된 다음의 일이다.
요즘 여의도 의원들이 약속을 해놓고 하루도 안돼 딴말한다고 온갖 비난을 받고 있다. 국민의 대표들이 초등학생처럼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도장 찍으면서 다짐했다는데, 아무런 보람이 없으니 어린이들이 다 놀랄 일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두고 '극적 합의' 운운하는 것도 문제지만, 합의장에서 등을 돌리자마자 '미안하지만 득을 본 건 우리, 너희는 손해'라고 손익계산서를 들추는 무신경이 더욱 놀랍다.
서로 윈-윈(win-win)했다고 하는 최소한의 수사학적 배려도 없이 상대방을 자극해 대니, 군자인들 그 약속이 예뻐보일 턱이 없을 것이다.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