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반토막된 13만명 쏟아져 … 한국엔 인력 리모델링 기회

투자은행(IB)의 경쟁력은 인재에서 나온다. 금융을 필요로 하는 기업과 투자자를 연결시키고,투자상품을 개발.판매하고 자금을 운용하는 IB 비즈니스의 핵심 과정이 모두 사람을 거쳐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금융위기로 월가 전문 인력들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이 한국 IB엔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호기라고 강조한다. 더욱이 월가 인재를 영입하면 이들의 인맥을 통해 해외 주요 지역을 아우르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조기에 구축할 수 있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실장은 "월가 IB업체들의 잇따른 감원은 한국 증권사들이 인력구조를 세계 수준으로 리모델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이를 통해 단번에 세계시장의 중심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기 여파로 올 겨울 자리를 잃을 월가 IB인력은 1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올해는 성과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몸값은 사실상 작년의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는 소식이다.

최근 월가를 둘러보고 온 한 증권사 관계자는 "과거엔 보너스를 합쳐 연봉 100만달러를 달라고 했던 베테랑 팀장급 인력도 지금은 절반만 주면 영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계 증권사 한 임원은 "월가에서 밀려난 고급 인력들이 일자리를 찾아 홍콩으로 건너오는 사례가 늘면서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헐값에 인재를 쓸어담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월가 커피숍마다 인재를 유치하려는 스카우터들과 면접을 보는 구직자들로 북적거린다는 소식도 들린다.

여기에 아시아 금융중심지인 홍콩.싱가포르와 서울에 있는 외국계 금융회사에서도 혹독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어 인재풀은 어느 때보다 넉넉하다. 실제 씨티그룹은 2만3000명을 감원한 데 이어 최근 5만2000명을 추가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골드만삭스도 전 세계적으로 10%의 인력을 줄였다. 또 경영사정이 워낙 나쁜 만큼 내년에 가면 월가의 추가 감원이 잇따를 것이란 전망이다.

◆한.중.일 인재유치 경쟁

하지만 사정은 결코 한국IB에 유리하지 않다. 이미 일본과 중국은 세계 IB시장의 강자를 꿈꾸며 월가 인력 스카우트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인재전쟁이 이미 시작됐다는 얘기다.

인재전쟁에서 가장 앞서가는 아시아 회사는 일본 노무라증권이다. 노무라는 이미 리먼브러더스 아시아본부를 인수, 수천명의 인재를 확보한 데 이어 최근에는 직접 월가로 나가 인력 채용을 서두르고 있다. 또 중국은행(BOC) 등 중국 금융회사들도 뉴욕 월가는 물론 런던시티에서까지 현지인력 스카우트에 들어간 상태다. 이는 이번 금융위기를 우수 인재 유치기회로 적극 활용하라는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한국 증권사중에는 삼성증권이 가장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 회사는 박준현 사장의 진두지휘로 홍콩을 중심으로 팀장급 이상으로 활동할 A급 시니어인력 50명 정도를 내년 2월까지 채용키로 하고 지난 9월부터 홍콩과 월가를 오가며 영입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의 대규모 인력유치 계획은 아시아금융 중심지인 홍콩에서 글로벌IB들과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밖에 KTB투자증권,우리투자증권,대우증권 등도 해외 인재 확보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일본.중국은 현지서 영입나서
'글로벌 인력전쟁' 본격화

◆인재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골드만삭스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진로 M&A에 대한 투자로 수조원의 수익을 챙길 수 있었던 것도 인재의 힘이었다. 당시 골드만삭스는 1988년부터 몸담고 있던 노석주 상무를 파견해 진로 딜을 성사시켰다. 노 상무는 진로의 국내외 채권 매입,법정관리,매각 등을 주도하며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챙겨줬다. 물론 그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인센티브를 받았다.

당시 자산관리공사에서 부실채권 매각을 담당했던 최범 KTB투자증권 상무는 "IB비즈니스에서 전문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노 상무는 굉장히 머리가 차가운 사람이었고 일에 관한 한 무서운 집념이 있었다. 그는 진로 딜에 개입한 후엔 진로 소주만 마시며 딜을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최 상무는 "IB는 결국 네트워크 비즈니스다. 골드만삭스가 한국 사정에 밝은 노석주라는 사람을 찾아내고 그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둔 것은 해외로 진출하려는 한국IB가 벤치마크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외환위기로 국내 M&A시장을 허무하게 내줬던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 증권사들은 이후 적극적으로 외국계 인재를 수혈했다.

그 결과 대형사만 해도 100여명이 넘는 외국계 IB출신들이 근무하고 있다. 최고경영자(CEO)로는 김성태 대우증권 사장,김기범 메리츠증권 사장,김명한 KB투자증권 사장,임기영 IBK투자증권 사장,호바트 엡스타인 KTB투자증권 사장,이현승 SK증권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전문가들은 해외인재를 영입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도 많다고 지적한다.

권순우 실장은 "그동안 IB사업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며 "분명한 선발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IB의 목적이 해외진출이라면 현지화된 인력을 뽑아 네트워크를 넓혀야 하며 그 네트워크를 유지할 능력이 있는지도 체크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 상무는 "과거 골드만삭스가 진로 딜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에 대한 로열티를 가진 인재를 뽑았다는 것"이라며 "조직에 충성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