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인 인물보다 의지가 강한 배역을 좋아해요. 특히 이번에는 의지와 행동이 일치하는 신여성역이어서 더욱 좋았죠.한 남자가 완벽하게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이 돼 그 남자의 인생을 바꿔놓으니까 매력적인 배역이지요. "

내달 2일 개봉되는 정지우 감독의 대작 사극영화 '모던 보이'(12세 이상 관람)에서 여주인공 조난실역을 맡은 김혜수(사진)는 반년간의 촬영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2000년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인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75억원을 투입해 만든 '모던 보이'는 1930년대 경성(옛 서울)을 배경으로 일제와 독립군의 대결,남녀의 사랑을 겹쳐놓은 시대극.여기서 조난실은 초선총독부 서기관인 모던 보이 이해명(박해일)의 상대역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캐릭터다. 극중 조난실은 댄서와 가수,재단사로 거듭 변신하면서 '일본인이 되고 싶던' 모던 보이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조난실의 정체가 드러날 즈음,모던 보이는 애초의 소망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일제치하라는 시대의 불행이 개인의 행복과 무관할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예요. 조난실은 끊임없이 다른 인물로 둔갑하지만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개인의 사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해명과는 근본적으로 출발점과 목표가 다른 셈이죠.그러나 이해명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하게 되죠."

조난실처럼 강단있는 여성은 영화 속 김혜수의 트레이드마크다. '타짜'에서 타인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요부 정마담,'바람피기 좋은 날'에서 남편에게 불륜 행각을 들킨 뒤에도 당당한 아내,'열한번째 엄마'에서는 낳지 않은 아이에 대해 강렬한 모성애를 발휘하는 여인이었다. 빈둥거리며 사는 백수로 출연한 '좋지 아니한가'에서조차 헝클어진 머리와 트레이닝복을 입고 등장해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조난실이 이해명에게 건네준 도시락이 폭발한 후 이해명이 복수전을 펼치는 장면에서 김혜수는 실제처럼 난투극을 벌였다.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동안에는 아픈 줄 몰랐어요. 촬영이 끝난 뒤 살펴보니 온 몸에 멍이 들고 붓고,눈에 흙이 들어갔더군요. 코도 빨개졌구요. 살아있는 느낌을 보여주기 위해 품위를 완전히 버리고 철저히 망가졌어요. "

그는 일할 때 주변인들과 조화를 중시한다. 이는 젊은 배우들이 활개치는 영화계에서 삼십대 후반의 김혜수가 여전히 여주인공으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제가 주역으로 발탁되는 것은 연기력과 미모가 출중하기 때문이 아니죠.선배들과 비교해보면 증명되지 않습니까. 다만 오랜 방송 MC 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고,상대방 얘기를 진심으로 경청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일할 때에도 그걸 지키려고 노력해요."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