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때 골을 넣은 박지성이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덥석 안기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8강전 때의 일이다.

대결팀은 한국과 스페인. 명백해 보이는 스페인 선수의 파울을 이집트 출신 주심이 지적하지 않자 화가 난 거스 히딩크 감독은 터치 라인 가까이 까지 나가 항의했다.

당연히 규정 위반. 주심이 히딩크 감독에게 퇴장도 명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한국팀은 상당한 심리적 동요 속에 고전할 게 분명했다.

자신에게 뛰어오는 주심에게 히딩크는 어떻게 응수했을까? 기억하다시피 그는 싱긋 웃으며(killing with smile) 가지고 있던 물병을 주심에게 쑥 내밀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 반전에 긴장을 푼 주심도 미소로 화답한 뒤 운동장으로 돌아가 경기를 속행시켰다.

당시 한국팀의 4강 진출은 말 그대로 '기적'이자 '신화'였다.

월드컵 직전만 해도 한국팀은 FIFA 랭킹 40위. 조별 예선에선 D조 4위였고, 선수들 몸값은 모두 합해봐야 잉글랜드 축구팀의 스타인 데이비드 베컴 한 명에도 못 미쳤다.

그랬던 태극전사들이 4강 진출이라니 4천700만 남녀노소가 난리법석을 떤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FIFA 랭킹 5위 포르투갈과 6위 이탈리아를 거푸 꺾더니 8위 스페인까지 무릎을 꿇게 했으니 말이다.

전국은 온통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 함성으로 메아리졌다.

월드컵 직전까지만 해도 '5대0' 별명으로 조롱받던 히딩크 사단의 괴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신화 창조'를 계기로 히딩크 리더십을 배우자며 그의 열풍이 한동안 뜨겁게 일었다.

강한 자신감이 비결이라는 이도 있었고, 특유의 동기부여와 조직응집력 덕분이라는 이도 있었다.

탄탄한 신뢰가 기초라는 분석도 나왔다.

그중 하나로 주목받은 게 갈등 조정능력이었다.

갈등을 사전에 원천 방지하는 데 주력하되 갈등이 생겼을 경우엔 뒤탈없이 매끄럽게 극복해내는 역량을 발휘했다.

일종의 소프트랜딩이다.

흔히 조직사회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로 간주된다.

그러나 유능한 리더는 이 갈등이 싹트지 않게 환경을 조성하되 막상 생겼을 땐 후유증을 최소화시켜며 상황을 풀어낸다.

히딩크 감독은 탁월한 유머 감각을 요긴하게 활용하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횟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산낙지가 메뉴로 나왔다.

기겁을 한 히딩크 감독이 얼른 얼굴에 특유의 미소를 올린 뒤 "한국과 네덜란드의 협력과 우호 증진을 위해 얀이 먼저 시식하겠다"고 자국 출신의 얀 코디네이터를 지명했다.

얀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꿈틀거리는 산낙지를 입에 넣어 꿀꺽 삼켰다.

이어 베어벡 코치가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오르면 먹겠다"고 살짝 빠져나가자, 히딩크 감독은 "목표가 그것밖에 안돼? 나는 결승에 오르면 먹겠다"며 능청스럽게 젓가락을 다른 음식으로 옮겨 좌중이 웃음바다가 됐다.

히딩크는 코치진의 융화, 선수들의 화목, 축구협회의 협조, 원만한 언론 관계, 붉은악마의 응원, 국민의 전폭적 지지, 대표팀의 사기충천 등 선순환을 이끌어내며 신화 아닌 신화를 낳았다.

골을 넣은 박지성 선수가 친 아빠라도 되는 양 감독에게 달려가 깡총 뛰어 안기는 장면의 배경에도 이 같은 노력이 숨어 있었다.

이런 히딩크 리더십이 지난달 말 2008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08)에서 또다시 빛을 발했다.

유럽 축구의 변방인 러시아팀의 감독으로 출전해 4강 신화를 일궈낸 것이다.

'히딩크 마법'에 힘입어 러시아는 FIFA 랭킹이 13계단이나 뛰어올라 11위가 됐다.

러시아팀이 이 대회에서 4강에 오른 것은 소련 해체 이후 처음. 한국이 IMF 위기로 침체된 분위기를 월드컵으로 일신한 것처럼, 러시아도 유로2008을 계기로 국가의 자신감을 회복했다며 들뜬 분위기다.

8강전에서 조국 네덜란드팀까지 울리며 러시아의 자긍심을 높여준 그가 모스크바에서 영웅 대접을 받은 건 당연했다.

히딩크 감독이 7일 한국을 다시 찾았다.

경북 포항의 한동대에 마련된 제2호 히딩크 드림필드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해 7월에도 충북 충주의 성심맹아원에 개장된 제1호 히딩크 드림필드의 준공식에 참석하러 히딩크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한국에 온 바 있다.

그는 이날 러시아 4강 진출 비결을 기자들이 묻자 "한국을 이끌 때처럼 선수들을 믿었다"며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축구를 떠나 그의 리더십에 다시 눈길이 가는 이유는 신뢰에 바탕을 둔 갈등 예방과 조정력 때문이다.

이번 방한이 촛불집회 등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때 이뤄져 더 그런지 모르겠다.

앞의 사례에서처럼 자칫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 상황을 멋진 유머와 재치로 반전시키는 묘미는 다른 분야에서도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이 유머와 재치가 여유와 이해에서 나옴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