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 유력…조명시설 누전 가능성 등도 조사

설 연휴 마지막날인 10일 저녁 국보 1호인 숭례문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큰 불이 나 1,2층 누각이 전소돼 무너져 내리는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소방당국은 5시간 넘게 진행된 진화 작업에도 숭례문 붕괴를 막지 못했고, 방화 용의자에 대한 경찰의 수사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 발화 순간 = 서울 중구 남대문 4가 숭례문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한 것은 10일 오후 8시50분께.
화재 장면을 목격한 택시기사 이모(44)씨는 "근처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50대 정도로 보이는 어떤 남성이 쇼핑백을 들고 숭례문 옆 계단으로 올라갔다"며 "불꽃놀이를 하듯이 빨간 불꽃이 퍼져나와 신고를 했다"고 말했다.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펌프차와 고가 사다리차 등 소방차 32대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켜 진화 작업에 들어갔다.

누각 2층 지붕에서 발생한 불로 목재가 타면서 주변이 온통 하얀 연기로 뒤덮혔으나 소방관들은 `국보 1호'라는 문화재 특성상 훼손을 우려한 나머지 일반 건물처럼 적극적인 진화 작업을 펼치지는 못했다.

◇ 초기 진화 실패 = 타오르던 불길이 발화 40여분만인 오후 9시30분께 거의 사그라지면서 `훈소상태'(연기만 나는 상태)가 되자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은 한때 불이 잡힌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기와 안쪽에 남아있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고 남아있다가 곧 다시 맹렬한 기세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소방당국은 오후 9시35분께 문화재청으로부터 "화재진압이 우선이니 국보인 남대문의 일부를 파기해도 된다"는 협조를 얻어낸 뒤 현판 일부를 잘라내고 본격적인 진화에 나섰다.

소방당국은 9시55분에 화재비상 2호를, 40여분 뒤 이 보다 한단계 높은 화재비상 3호를 각각 발령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으나 연기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기와 안쪽의 `적심' 부분이 전통 목조건물의 방수처리 공법으로 처리돼 있어 아무리 물을 뿌려도 소용이 없었다.

화재 진압팀은 오후 11시20분께 냉각수 대신 거품식 소화 약제를 뿌리기 시작했으나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 결국 붕괴로… = 숭례문 지붕을 해체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화재 발생 3시간 만인 오후 11시50분께부터 전격적인 `마구잡이' 지붕 해체 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앞서 진화 작업을 위해 뿌린 물이 얼어 붙는 바람에 소방관들이 지붕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는 사이 불길은 점점 더 번져나갔다.

자정을 넘어 불은 2층 전체를 휘감아 누각 곳곳을 뚫고 5~10m 높이에 이르는 거대한 불기둥을 뿜어댔다.

숭례문 2층 누각은 11일 0시58분께 서울역을 바라보는 뒷면부터 우수수 무너져내리기 시작해 삽시간에 붕괴로 이어졌다.

결국 발생 5시간만인 오전 1시54분께 진화 노력도 헛되이 누각 2층과 1층 대부분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보가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 화재 원인 및 수사 = 택시 기사 이씨 등 목격자 진술에 따르면 이번 화재는 직전에 숭례문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50대 남성의 방화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남성은 항공점퍼와 검은색 등산바지를 입고 있었고 불이 난 뒤 계단을 내려와 유유히 걸어서 도망갔다고 이씨는 전했다.

화재 직전 무인경비시스템에 외부인 침입 사실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다는 점도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숭례문 무인경비서비스를 제공하는 KT텔레캅 관계자는 "경보가 울려서 현장에 나와보니 불이 나 숭레문이 타고 있었다"고 전했다.

경찰은 이씨가 진술한 50대 방화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A(55)씨를 현장 부근에서 붙잡아 조사를 벌였으나 알리바이가 확인돼 귀가조치했다.

숭례문에 설치된 전기 조명시설에서 누전이나 전기합선으로 불이 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조명시설이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2층 지붕이 아닌 1층 지붕에 있으며 불이 난 이후에도 한 동안 켜져 있었다는 점에서 누전 가능성이 낮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한국전기안전공사 관계자는 "지붕 2층에는 전기시설이 아예 없고 1층에는 조명이 있지만 누전차단기가 설치돼 있어 누전시 바로 차단이 된다"며 누전에 의한 화재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일단 방화와 누전 등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벌이고 있으며 화재 당시 상황이 찍힌 주변 건물 등의 폐쇄회로(CC)TV를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 피해 규모는 = 숭례문의 붕괴는 명실상부한 국내 대표격 문화재인 `국보 1호'의 소실이라는 점에서 재산 손해액수로만 계산할 수 없는 유ㆍ무형의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연 면적 177㎡의 2층 건물인 숭례문은 조선 태조4년인 1395년 짓기 시작해 태조 7년인 1398년 완성된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수 차례 전란에도 600년 이상 위용을 자랑해왔다.

숭례문은 도성 8문 중 가장 중요한 정문이며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또 `崇禮門'이라고 적힌 현판도 이날 진화 과정에서 귀퉁이가 일부 훼손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해지며, 세종의 셋째 아들로서 조선의 명필이었던 안평대군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서울=연합뉴스) firstcircl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