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절망하지 않으면 성공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파문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에 다가와 세계금융시장에 대지진을 일으키고 있지만 몇 가지 교훈을 되새기게 했다. 파티는 계속될 수 없고 리스크는 무섭다는 점을 가르쳐줬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 '괴물'은 원래 신용도가 낮은 사람에게 집을 담보로 잡고 대출한 채권이다. 그냥 놔두면 못난이로 그럭 저럭 살아갈 운명이었다. 솜씨 좋은 투자은행이 칼을 댔다. 잘게 쪼갰다. 신용 좋은 채권도 버무려 넣었다. 보기 좋게 뭉뚱그렸다. 고수익을 좇는 헤지펀드들이 입을 대기 시작했다. 인기가 갈수록 높아졌다.

미국에서 금리가 뛰었다. 주택가격도 떨어졌다.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그럴 듯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다. 수술 자국이 흉물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공포소설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으로 변했다. 벌떡 일어서더니 모세혈관처럼 이어진 초고속 금융네트워크를 타고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을 초단위로 넘나들었다. 집적거리던 투자자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다. 골드만삭스도,프랑스 최대은행인 BNP파리바 은행도 당했다. 외환시장까지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흉칙한 이 괴물은 한국 증시에서도 이틀 새 100조원을 파먹었다.

피가 흥건하지만 다행스런 측면도 있었다. 이 녀석이 고분 고분할 때 만지작거린 국내 금융회사들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혹시 골드만삭스 꼴 나는 은행이 속출하는 게 아닌가,또다시 금융위기에 빠지는 게 아닌가 우려했지만 국내 금융회사가 서브프라임 관련 상품에 투자한 금액은 8억5000만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평가손실은 8500만달러(약 800억원)가 채 안 된다. 국내 금융회사들은 실력이 달려 투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글로벌화가 덜 돼 그런 녀석이 있는 줄도 잘 몰랐다. '못난 실력'이 효자역할을 했다. 자칫 한국에서 프랑켄슈타인이 태어날 뻔 했다.

괴물이 쳐들어오기 한참 전 외상으로 주식을 사는 신용융자를 제한한 것도 충격을 줄이는 효과를 냈다. 주가가 급등하던 당시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여의도가 전사자들로 뒤덮였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신용제한으로 돈 벌 기회를 잃었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조치가 안전판 역할을 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 꼴이다.

외환보유액이 과다하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7월 말 현재 2548억달러. 외환위기 때 보다 30배 이상 늘었다. 수익률이 낮은 외환보유액을 줄여야 한다는 게 많은 경제학자들의 주장이다. 서브프라임발 세계금융위기가 닥친다고 가정해보니 무작정 비판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도쿄의 아줌마'들도 큰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값싼 엔화를 빌려 해외 고수익상품에 투자하는 엔캐리트레이드의 열풍을 일으킨 주역들이다. 프랑켄슈타인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이들이 서둘러 고수익 상품을 팔아치우고 있다. 앞으론 투자리스크를 요리 조리 따져볼 것이다.

서브프라임 파장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정나미 떨어지지만 리스크를 무시하는 투자자들에겐 정신 바싹 차리게하는 회초리였다. '영원한 불효자'는 없다.

고광철 국제부장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