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집안에서만 놀게 하면 그 아이는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겠어요?

문을 열고 나서면 동네 아이와 싸우기도 하고 경쟁할 수밖에 없지만 안전하다고 집 안에만 있는 건 해결책이 아니지요." 추기경의 대답은 명쾌했다.

지난 월요일(2일)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얘기다.

협상 과정에서 논란과 갈등이 많았던 만큼 질문하기조차 조심스러웠으나 추기경은 간단한 비유 하나로 문제를 정리했다.

지난해 한국의 두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76).늘 온화하고 겸손하며 조용한 성격이라 세간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편이지만 원칙을 이야기할 땐 단호하고 꼿꼿하다.

기독교의 큰 명절인 부활절(8일)을 앞두고 서울 명동성당 옆 집무실에서 정 추기경을 만났다.

-부활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우리 삶에 제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으나 불행히도 죄와 악이 우리 삶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원래 창조한 의도대로 인간이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도록 성자 예수님을 보내셨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로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가져다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혹독한 고통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불의를 극복하고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부활을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란 부활을 믿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본을 받아 죄와 죽음에 대항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며칠 전 발표한 부활절 메시지에서 생명경시 풍조를 걱정하면서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체세포복제 배아 연구를 제한적으로 허용키로 한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하셨던데요.

체세포복제 배아 연구에 반대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생명은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과학적 발견이나 발명은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생명은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서 생명은 신비로운 것인데,인간이 생명을 조작하면 불행이 닥쳐와요.

우리나라는 30여년 전부터 모자보건법을 제정해 산아제한을 했는데 오늘날 그 폐해가 얼마나 큽니까? 세계 최고의 낙태율과 자살률은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날 심각한 저출산 문제는 생명을 거스른 죄악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에 대한 정 추기경의 설명이 길어진다.

온화하던 표정도 굳어지고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간다.

성체줄기세포라는 대체방안이 있는 데도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불치병 치료의 유일한 길인 것처럼 오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추기경 서임 소식에 모든 국민이 기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추기경으로서 지내보시니 어떻습니까.

"추기경의 제일 큰 임무는 교황님의 자문에 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주교였을 때와 달리 추기경은 전세계에 대한 안목을 갖춰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해요.

국민들께서도 그런 기대를 가지셨을 텐데 미흡해서 송구스럽습니다."

-지난달엔 추기경 서임 1주년 기념행사도 마다하고 전집 출판기념회로 대신하셨던데요,바쁜 가운데 그 많은 책들을 어떻게 쓰셨나요.

"이 나이까지 살게 하시고 큰 병 없이 건강하도록 보살펴주신 하느님의 은혜 덕분이지요.

또한 주변의 여러 분들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못했을 일이고요.

사실 저는 6·25 때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로 '오늘이 내 일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늘 잠재적으로 의식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시간이 아깝고,지금 가진 이 시간을 보람있게 선용하려고 최대한 노력합니다.

내가 뭘 남겨놓고 세상을 떠날까 하니 글밖에 없어요.

시간이 아까워서 다른 취미생활도 못하고 책 읽고 글만 쓰다보니 이젠 그게 재주요,취미가 돼버렸습니다."

-마침 FTA 후속 대책으로 문화관광부에서 국민 '1인 1책 쓰기'를 권장키로 했는데,추기경께선 선구적으로 해오셨군요.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문맹률이 제일 낮은 나라인데 그건 모든 음을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우기도 쉬운 한글 덕분입니다.

인터넷 사용률이 세계 최고인 것도 한글 덕분일 겁니다.

문맹률이 최고라는 건 글을 쓸 가능성이 최고라는 얘기이므로 우리 국민이 책을 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지요.

'1인 1책 쓰기'에 전폭적으로 찬성합니다."

-며칠 전 14개월의 힘든 과정을 거쳐 한·미 FTA가 타결됐습니다.

그간 FTA에 대해 찬반 논란이 격렬했고 반대하는 이들의 항의시위도 많았습니다.

FTA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세상을 두려워하면 한이 없습니다.

원시인이 동굴 안에서만 살았다면 인류가 발전했을까요? 집안에 있으면 안전하긴 하지만 문을 열고 세상에 나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는 나라 안에서만 살아도 됐지만 지구촌 시대에 문을 닫고 살 수는 없지요.

우리 휴대전화가 세계 어디서나 터지는 이 시대에 국내에만 갇혀서 어떻게 살아요? 경쟁은 두렵지만 경쟁을 해야 발전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열 것이라면 적극적 자세로 경쟁에 임해야겠지요."

-FTA에 관한 논란도 그랬습니다만,우리 사회에는 빈부·지역·계층·노사·이념 등 여러 가지 갈등에 대해 극단적 논리만 난무하고 이를 조정·통합할 여유가 부족해 보입니다.

"인류 역사 1만년 중에 똑같은 사람이 있던가요? 없지요.

우리 민족도,형제도,심지어 쌍둥이도 다릅니다.

서로 장·단점이 다르고 의견도 다르지요.

그러면 어떻게 살까요? 타협해야 살지요.

전세계가 형제이지만 서로 다르니까 타협해야 사는 겁니다.

그래서 FTA도 타협하는 것이고요.

우리 협상팀의 김종훈 수석대표가 "우리도 이익을 본 것이 있고,미국도 이익을 본 것이 있다"고 했던데 바로 그겁니다.

어느 한 편만 손해봐서는 타협할 수가 없거든요.

사람마다,나라마다 재주와 장기가 다르므로 우리가 잘하는 것과 다른 나라가 잘 하는 것을 서로 바꾸고 돕는 게 FTA라고 봅니다."

-북한 핵 사태로 경색됐던 남북관계가 호전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바라는 통일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통일의 열망이 크다고 해서 막바로 통일로 가긴 어렵다고 봅니다.

마음을 여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지요.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나는 게 그 첫번째 단계입니다.

화상상봉은 원하면 다 하게 해야 하고 이산가족 상봉자 수도 대폭 늘려야 해요.

편지와 전화도 자유롭게 해야 됩니다.

인도적 사업의 최우선은 가족을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여서 벌써부터 대권주자들의 움직임이 부산합니다.

한국의 미래를 책임지고 이끌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 돼야 할까요.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분이 나와야 우리나라가 축복받습니다.

예수님도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어요.

그런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분,공익을 위해 사익(私益)을 버리는 멸사봉공의 자세를 갖춘 분이 출마하시기를,그리고 그 중 가장 뛰어난 분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공직이 대권 아닙니까."

-지난해 서점가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눈앞의 작은 유혹을 참고 견디면 더 큰 성공의 열매를 얻게 된다는 내용의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이었습니다.

혹시 성직자로 사시면서 어떤 유혹에 빠져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가지 유혹을 느끼면서 사는데,그럴수록 가치관 정립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선택의 기준이 자기의 가치관입니다.

특히 정신적·지적·도덕적 가치를 위해서는 물질을 초월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땐 '수신(修身)' 과목이 있었는데,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수신이며 자기를 잘 통제하는 사람이 성공해요.

박태환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등을 한 것도 극한상황을 이겨낸 수신의 결과지요."

-내 인생에서 이것 하나만은 꼭 하고 마무리하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는지요.

"지금까지 참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주위 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는데 갚을 길이 없어요.

그 은혜와 사랑을 최대한 갚았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정 추기경은 "방금 말한 것처럼 하면 돼요"라고 했다.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갚으면서 살라는 얘기였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