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두자일 마을의 시아파 주민들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돼 30일 사형이 집행된 사담 후세인(69) 전 이라크 대통령은 아랍권의 패권을 손에 쥘 야망을 가졌던 독재 통치자였다.

그는 서방의 시각에선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언제라도 무력을 동원하는 `전쟁광'이었지만 한때 중동지역 민중에게 아랍의 자존심을 세웠던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한 두 얼굴의 인물이다.

세대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부시 부자'와 충돌했던 그는 2003년 아들 부시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됐고 같은 해 12월 고향 티크리트의 한 농가 토굴에서 수염이 더부룩한 초라한 모습으로 체포됐다.

1937년 4월 28일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50㎞ 떨어진 티크리트시 외곽의 알-오자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후세인은 생후 8개월 만에 고아가 돼 군 장교였던 반 영국 투쟁가인 외삼촌에게 맡겨졌다.

18세 때 바그다드로 상경,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1956년 반정부 봉기를 계기로 이듬해 범-아랍 사회주의 부흥당인 바트당에 입당한다.

이 때부터 후세인은 본격적으로 정치수업을 받으며 바트당의 핵심분자로 성장한다.

그의 정치투쟁 경력은 1956년 이라크 국왕 파이살2세 제거를 노린 불발 쿠데타에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1959년 왕정붕괴 후 집권한 압델-카림 카셈 대통령 암살모의에 개입, 국외로 도피해 시리아와 이집트를 전전하다 1963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바그다드로 돌아왔으나 불과 9개월 뒤 다시 정권이 뒤바뀌자 체포돼 1966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카셈 대통령의 암살모의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가까스로 도망쳤는데 그는 자서전에서 이 일에 대해 "옥도에 칼날을 적셔 스스로 총탄을 빼냈으며 유목민으로 변장, 티그리스 강을 헤엄쳐 당나귀를 타고 시리아로 도주했다"고 썼다.

후세인을 이집트로 불러들인 인물은 다름 아닌 아랍 민족주의 주창자인 가말 압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다.

나세르는 당시 이라크 정권과 범 아랍 공화국 창설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1968년 바트당의 재집권 계기가 된 쿠데타에서 핵심역할을 한 뒤 혁명평의회 부의장으로 권력의 최정점을 향해 급속히 부상하던 후세인은 마침내 1979년 아메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의 뒤를 이어 이라크 지도자의 자리에 섰다.

후세인은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연합세력을 물리치고 예수살렘을 탈환한 이슬람의 영웅 살라후딘의 이름을 따 자신도 살라후딘과 같은 추앙을 받자는 뜻에서 자신이 태어난 티그리트주의 이름을 살라후딘주로 개명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할 기회를 노리던 후세인은 1980년 9월 이란-이라크전을 일으켰고 1988년 참혹한 대가만을 남긴 채 이란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전쟁으로 인한 외채 부담에서 벗어날 기회를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모색했던 후세인은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지만 전 세계적인 비난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라는 위기에 처했다.

이어 1991년 1월 미군 주도의 걸프전에서 패퇴한 후세인은 그해 2월 쿠웨이트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했다.

잇따른 실정에도 후세인은 1995년 10월과 2002년 10월 두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100%에 가까운 압도적은 찬성률로 대통령직을 이어간다.

그가 이라크를 100만명의 군사력을 가진 중동의 군사 강국으로 변모시켰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어깨를 견주는 산유국으로 키운 공로도 분명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걸프전 이후 후세인은 아랍권에서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 팔레스타인을 해방할 유일한 중동 지도자이자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이후 유엔의 경제제재 등 국제적 고립, 미국 및 영국의 끊임없는 군사적 압박 속에서도 탄탄한 국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후세인은 결국 9.11 테러 이후 강경파가 득세한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의 사상 유례없는 `예방전쟁' 속에 두 아들을 잃은 채 권좌에서 쫓겨나 도망자 신세가 돼야 했다.

지난 2004년 미군에서 이라크 임시정부로 인계된 후세인은 지난해 두자일 마을 학살사건 주도 혐의로 이라크 특별재판부에 의해 기소되며 법정에 서야 했다.

지난해 10월19일 시작된 후세인 재판은 피고측 변호사의 피살과 후세인의 옥중 단식 등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결국 법원은 "총살형을 받겠다"고 말했던 후세인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마침내 후세인은 26일 최고 항소법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면서 24년에 걸친 그의 철권통치의 흔적과 서방 세계에 맞서 중동의 패권을 쥐려는 야심도 교수대에 함께 매달려 그 명운을 다하고 말았다.

(두바이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hska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