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이후 한국 영화계의 큰 버팀목이었던 신상옥 감독이 11일 밤 향년 80세로 타계했다.

전후 혼란기에 작품성과 흥행성을 고루 갖춘 영화를 발표하며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온 신 감독은 톱배우였던 아내 최은희 씨와 납북과 탈북의 과정을 거치며 마치 영화의 주인공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

192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신 감독은 해방이 되던 1945년 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46년 미술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감독 데뷔작은 '악야(惡夜)'. 김광주 원작의 '양공주'를 다룬 '악야'에서 그는 추악한 현실을 고발했다.

'무영탑'(1957), '동심초'(1959) 등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는 문예물을 만드는 한편 '돌아온 사나이' '로맨스 빠빠'(이상 1960) 등을 통해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1953년 당시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톱스타 최은희 씨와의 결혼으로 대중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 영화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 등 우리 민족의 감성과 역사가 살아 있는 작품을 만들었던 1961년 이후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일본과 베니스 영화제 등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1960년대 절정기를 맞은 그의 작품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역사에 시선을 맞췄으며 휴머니즘이 담겨 있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전후 격변기를 거친 한국 사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영화를 통한 계몽을 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3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한 이후 1966년 당시 한국 최대 영화사로 인식되는 신필름을 세워 1970년까지 운영했다.

신필름은 영세하던 영화 시장을 기업화된 계기가 됐으며 한국 영화의 소재 개발과 다양한 영화 창출의 근간이 됐다.

영화감독과 배우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1978년 최은희 씨가 납북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최씨는 1978년 1월 홍콩 영화사와 영화 제작 및 영화 홍보를 하던 중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됐다.

6개월 뒤인 7월 신 감독 역시 납북돼 북한에서 영화제작을 하기도 했다.

그가 북한에서 만든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탈출기'(〃), '소금'(1985), '사랑 사랑 내 사랑'(〃), '심청전'(〃), '방파제'(〃), '불가사리'(〃) 등 7편의 영화는 한국 영화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중 고려시대 민담에 기초한 '불가사리'는 2000년 7월 국내 극장에서 상영된 북한 영화 1호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납북된 지 8년 만인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 대사관을 통해 탈출했다.

탈북 후에도 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마유미'(1990),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 사건을 다룬 '증발'(1994) 등을 만들어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세계 영화계 인사들과 교류를 해온 신 감독은 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2002년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2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며, 2003년에는 '상록수'가 칸 영화제 회고전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유작은 2002년 신구가 주연을 맡은 '겨울이야기'. 그의 75번째 감독작이었으나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미개봉작으로 남아 있다.

같은 해 1월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뮤지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제작했다.

2003년 안양신필름영화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동아방송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는 등 말년에도 후배를 양성하며 한국 영화계에 변함없는 애정을 쏟아부었다.

신 감독은 2004년 2월 C형 간염에 감염돼 간 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이후부터 종종 기력이 급격히 쇠해져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보름 전쯤 갑자기 악화돼 4월11일 오후 11시39분 눈을 감았다.

(서울연합뉴스) 김가희 기자 kah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