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4일 미국프로풋볼(NFL) 슈퍼볼 MVP(최우수선수)에 오른 한국계 스타선수 하인스 워드(30.피츠버그 스틸러스)와 그의 어머니 김영희(59)씨를 청와대로 초청, 오찬을 함께 했다.


29년 전 혼혈의 아픔을 안고 조국을 떠났던 워드 모자(母子)에게 또다른 꿈이 현실로 다가온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날 청와대로 들어선 두 사람은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 김씨는 아이보리색 저고리에 자주색 치마 한복으로 한껏 멋을 냈지만 좀처럼 아들의 팔을 놓지 못했고, 본관 접견실에서 "떨리시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낮 12시 정각 접견실의 문이 열리자 노 대통령은 `특별한 손님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듯 우렁찬 목소리로 반갑게 맞이했다.


노 대통령과 권양숙(權良淑) 여사는 "어서오십시오. 반갑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인사했고, 워드는 영어로 "How are you doing(안녕하십니까)"이라며 깍듯이 예를 갖췄다.


감청색 양복 차림의 워드는 노 대통령이 등을 쓰다듬으면서 "되게 큰 줄 알았는데..."라며 대견해 하자 "긴장됩니다(nervous)"라고 말했고, 권 여사가 "우리나라는 물이 좋아서 차의 향이 좋다"며 손수 녹차를 따라주자 "베리 굿(very good)"이라며 사의를 표했다.


그래도 분위기가 풀리지 않자 노 대통령은 "커피 마시던 입에는 싱거워서 아무 맛이 없을텐데"라며 "원샷"을 권유한 뒤 곧바로 "하면 안된다고..."라고 주워담아 좌중을 웃겼다.


한국의 전통미가 담긴 다기 세트와 함께 따뜻한 녹차를 대접받은 워드는 답례로 노 대통령에게 "To president Roh Moohyun, Go Steelers, I ♡ Korea라고 적혀 있다"며 미식축구 사인볼과 함께 슈퍼볼 우승기념 모자와 등번호 86이 새겨진 자신의 유니폼 재킷을 선물했다.


워드는 노 대통령이 유니폼을 들어보이면서 "커서 못 입겠다.집에 걸어 놓을 게요. 아니면 양복 위에 입거나"라고 하자 "각하께선 이제 스틸러스 팬이 됐다"며 볼을 패스하라는 `작전지시'를 내렸고, 노 대통령은 볼을 던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우천으로 인해 경내 정원인 상춘재 대신 본관 백악실에서 진행된 오찬은 노 대통령의 `영웅 예찬'으로 시작됐다.


노 대통령은 "쉽게 얘기하면 영웅이 돼서 돌아왔는데, (워드) 개인적으로만 좋은 게 아니고 열심히 노력해 성공해서 세계적인 영웅이 됐다"며 "한국에서 자라나는 많은 젊은 아이들이 워드 선수를 보고 큰 꿈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치하했다.


하지만 워드는 "젊은이들의 모범과 귀감이 된다니 영광이고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다"며 오히려 겸손한 자세로 일관했고, 이에 노 대통령은 "참으로 착한 아들이에요. 그렇죠"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찬에는 김명곤(金明坤) 문화관광부 장관과 김용익(金容益)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이 배석했으며,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은 워드가 한국의 맛과 정성을 느낄 수 있도록 꽃등심구이와 밀쌈알이, 생선만두, 녹두죽, 삼색전이 포함된 다채로운 한식 메뉴를 제공했다.


이와 함께 최근 헌법기관장 만찬과 경제5단체장 오찬에서 잇따라 선을 보였던 막걸리가 반주로 제공돼 눈길을 끌었다.


노 대통령이 지난해 5월 농촌 체험차 찾은 충북 단양군 가곡면 한드미마을의 쌀로 만든 시골 막걸리였다.


후식으로는 진달래꽃을 띄운 오미자차가 제공됐는데, 워드는 "꽃도 먹는 것"이라는 노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참석자들의 건배 제의에 막걸리도 마셨다고 김만수(金晩洙)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오찬에선 우리 음식이 주요 화제 중 하나였다.


노 대통령은 "햄버거를 자주 드시나"라는 워드의 질문을 받고 "쌀밥이 좋다. 쌀밥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살도 안찌고 콜레스테롤도 낮추고 아주 좋은 식품이다. 그래서 3끼 밥만 먹는다"며 우리쌀 예찬론을 폈다.


노 대통령은 또 워드의 젓가락질을 보고 "젓가락을 잘 쓴다. 집에서도 평소 한식을 잘 먹느냐"고 물었고, 김씨는 "수제비를 많이 먹고 아주 좋아한다"고 답했다.


워드는 "어머니는 미국음식을 먼저 만들고 한식을 준비했지만 나는 항상 한식이 먹음직스러웠다"며 어린 시절을 회고한 뒤 "지금은 우리 팀원도 한식을 같이 즐겨먹는다.


오죽하면 팀원들이 언제 또 갈비 먹여줄거냐고 물어보기도 한다"면서 "이런 것은 또 혼혈의 장점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워드는 대통령 앞에서 조국에 대한 첫 느낌도 밝혔다.


그는 "한국이 매우 아름답다. 청와대 들어오면서 본 소나무가 아름다웠다"며 "어릴적 한국 문화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 적도 있었는데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워드는 그러면서 "지금 정말 후회되는 것은 한국어를 배우지 않은 것"이라며 " 앞으로는 어머니와 한국말로만 대화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다짐해 "열심히 배워보라"는 주위의 격려를 받았다.


최근 인터뷰에서 영화 출연 의사를 밝혔던 워드는 노 대통령이 "은퇴한 다음에 김명곤 장관에게 영화 한번 만들자고 해보라"고 하자 "나도 영원히 축구만 할 수 없으니까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워드는 방한 목적에 대해 "한국의 유산에 대해서 배우려고 온 것"이라며 "이전에 한국에 대해서는 '한국에 가면 신발벗고 방에 들어가야 된다'는 어머니 말씀 정도로만 한국에 대해 알았는데 더 배우기 위해서 왔고, 내가 한국에 있는 혼혈아동에 대해서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그 아이의 난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키워줄 수 있다면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시간30분 가량의 오찬을 마무리하면서 노 대통령은 "하인스 워드가 이미 우리에게 많은 희망을 주었고, 존재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거듭해서 격려하며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품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워드는 청와대 초청에 사의를 표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기자 j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