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장 남은 캘린더에 적어놓은 송년 술자리 약속이 점점 빼곡해지는 요즘이다.


12월에 마시는 술이 1년내 먹는 술보다 2∼3배는 될 것이라는 푸념이 무색치 않다.모름지기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술이 건강을 해친다'는 소리를 흘려듣고 싶지만 술에 약한 사람은 막막한 술자리를 어떻게 헤쳐나갈지가 고민거리다.


송년 분위기에 휩싸여 술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줄 만한 메시지가 있다.술은 발암물질이다.


2000년에 작성된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독성물질 보고서에 따르면 알코올은 구강암 인후두암 식도암을 단독으로 유발할수 있는 발암 물질로 음주량에 비례해 발병위험이 높아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상습 음주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구강암 및 인후두암은 10배,식도암은 20배,간암은 4배나 발생 위험이 높다.


특히 식도암은 알코올이 담배보다 훨씬 위험한 유발 인자로 80%가 과음과 흡연에 의해 초래된다.


알코올은 또 유방암의 유발률도 높여 미국에서는 여성이 음주량을 하루 1잔에서 2잔,3잔 늘릴 때마다 암 발병률이 10%씩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뿐만 아니라 알코올은 급성 췌장염 및 췌장암을 유발하는 거의 유일한 요인이며 직장암 대장암을 일으키는 주범 중 하나다.


무엇보다 한 번 망가진 췌장은 손을 쓸 수 없다는 점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유태우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여성호르몬 대체 요법을 하면 유방암을 유발한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알코올 자체가 유방암을 야기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약한 것"이라며 "술과 담배를 같이 하거나 알코올 분해 능력이 유전적으로 취약하고 알코올 중독자처럼 다량의 알코올을 상습적으로 섭취하는 사람은 발암 위험이 높다"고 경고했다.


술은 그 자체로 심각한 발암 물질은 아니다.


그러나 흡연 스트레스 영양결핍 면역계이상 유전자손상 등 다른 발암 요인에 의해 야기된 암의 씨를 키우는 촉발 인자 역할을 하므로 암을 일으키는 요인이나 다름없다.


예컨대 술을 장기적으로 마셔 사실상 중독증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은 비타민(특히 A,C,B1,B6,엽산) 무기질(특히 철분 칼슘) 단백질 등의 영양 결핍이 일어나 신체의 항상성과 면역력의 조화가 깨지게 돼 있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과음자 비율이 한국의 4분의 1에 불과한 미국에서 나온 것이어서 한국 애주가의 발병 위험은 더욱 높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가 2002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보건부 기준으로 '과음'(한 달에 5잔 이상 마신 날이 5일 이상인 경우)하는 사람은 한국이 31.3%로 미국의 8.4%를 압도했다.


한국 음주 문화는 이 같은 알코올의 위험성을 간과하는 동시에 △대인 관계가 사생활보다 중시되는 억압적 권주 문화 △술 마시고 실수하는 것에 대한 지나친 관용 △해장국·사우나·안주발에 의존하려는 음주 자세 등과 맞물려 바람직하지 않은 풍토에 찌들어 있다.


이정권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건전 음주'라고 해서 도수가 낮은 술 마시기,안주 챙겨 먹기,술 마신 다음 날 해장국을 찾거나 사우나 가기,폭음하는 대신 자주 안 마시기 등을 몸을 돌보는 방편으로 여기지만 임기응변적인 것에 불과하다"며 "음주로 인한 건강상의 피해는 흡수한 절대 알코올량과 음주 기간에 비례하는 만큼 건전 음주란 존재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한자리에서 3잔 이상 마시면 안 되고 그 이상 마신 다음 날에는 반드시 술을 쉬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