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취임 3년째를 맞이하면서 가시적 업적을 속속 보여주고 있다. 이종욱 총장은 현재 제네바에서 진행 중인 제58차 WHO연차 총회에서 예산 증액과 국제보건규칙(IHR) 개정안 채택, 대만 문제의 처리 등을 무난히 마무리했기 때문. 23일 해묵은 과제인 국제보건규칙 개정안이 통과된 직후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이종욱 총장은 '3마리의 토끼를 잡았다"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총회에서는 기구 예산의 18% 증액을 승인했으며 논의 과정에서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 유엔의 많은 기구들의 예산 증액을 못해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WHO만 대폭 증액이 허용된 것이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특히 유엔 기구들의 운영에 불만을 품고 예산 증액에 항상 반대해온 미국이 아무 말 없이 동의한 것은 WHO의 업무와 운영을 긍정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유엔 기구들은 미국을 비롯한 부국들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 부국들이 지원에 인색하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최근 유엔의 인도주의 업무 담당 기구들이 예산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가 활기를 잃고 있는 것은 미국이 기구 활동에 불만을 품고 분담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고 있는 결과다. 제네바의 외교 관측통들은 최근 이라크의 석유-식량 프로그램에 대한 비리 의혹이 미국쪽에서 불거졌고 코피 아난 총장과 몇몇 산하기구 총장이 비판을 받는 시점에서 WHO가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유엔 기구들을 똑같이 대접하지 않고 잘 하는 기구에 돈을 몰아주자는 입장으로 돌아선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해석이다. 올해 총회가 채택한 예산은 이종욱 총장이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제출한 예산안이었고 더욱이 대폭 증액이 수용됐다는 점도 그를 기쁘게 하는 듯하다. 지난해 총회에서 채택한 예산은 전임 브룬트란트 사무총장이 마련한 것이었다. 23일 총회에서 IHR 개정안이 30여 년만에 채택된 것도 성과의 하나. 인류의 보건을 위협하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WHO의 노력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국제보건규칙은 1969년 채택됐으며 콜레라와 티푸스, 황열병, 천연두를 포함한 6개 전염병에 대처하기 위한 국제공조의 첫 기틀을 마련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비판을 받아왔다. 근년 들어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조류독감 같은 신종 전염병의 등장, 중국 등의 정보 공개 기피 등이 개정안을 채택하게 된 배경이다. 개정안은 2년 뒤인 2007년 5월부터 발효되며 회원국들에 구속력을 갖게 된다. 이종욱 총장과 WHO는 개정안의 발효되면 종전보다 역할과 권한이 강화된다. 총장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상방역위원회를 설치, 전염병과 보건상이 위해요인들에 대한 건의안을 받을 수 있다. WHO는 회원국들에 정보 공개와 통보를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 또 전염병을 구실로 한 상품 반출입과 여행 규제 조치 등에 대해서도 조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해당국에 요구할 수 있다. 이종욱 총장은 IHR 개정안은 사실상 새로 작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담배규제 기본협약보다 국제보건 분야에서는 더욱 큰 파급효과를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장 스스로도 개정안을 둘러싼 갈등 조정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3차례에 걸쳐 제네바에서 열린 정부간 협상에 1천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했고 4월말의 최종 협상회의에서는 새벽까지 밤잠을 설친 채 설득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주 대만의 WHO 관련 통보는 모두 중국의 동의를 거치도록 하고 중국 위생부와 WHO가 대만-WHO간 전문가 기술교류를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 양해각서를 중국과 체결한 것도 '3마리 토끼' 가운데 하나. 그는 대만의 불만이 크다는 지적에 대해 대만을 국제보건공조의 틀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한 것이 중요하다면서 앞으로 대만 보건전문가들이 WHO의 협의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점을 주목해달라고 당부했다. 또 유엔기구 총장으로서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유엔 체제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모든 나라가 인정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주권과 관련된 문제는 스스로가 해결할 문제라고 못박았다. 이종욱 총장은 대만은 WHO의 문이 열려있음을 알고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에 덧붙여 대만의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WHO와 기술적 협력에 참여할 것을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종욱 총장은 한국이 담배규제협약을 최근 비준한 데 대해서도 사의를 표시했다. 그는 최근 국내 재계 인사들이 폐암으로 잇따라 타계한 점을 상기시키면서 보신에 신경을 쓰는 한국인들이 담배의 피해에 무심한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 총장은 담배규제는 세계의 보편적 추세이며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 협약 미비준 국가들도 결국은 대세를 따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제네바=연합뉴스) 문정식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