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일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요즘이지만 공연계에서는 올해 한ㆍ일 우정의 해를 기념한 교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물론 기대했던 것보다 교류 분위기가 많이 위축된 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술가들이 서로 방문해 공연하거나 양국 제작자들이 함께 작품을 만드는 시도가 그 어느 해보다 활발한 모습이다. 13일 오후 도쿄 신국립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창작 연극 '강 건너 저편에'는 합작의 의미를 가장 이상적으로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양국을 대표하는 공연장인 예술의전당과 신국립극장이 공동제작한 이 연극은 한ㆍ일 월드컵을 기념해 2002년 5월 신국립극장에서, 6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됐던 작품. 당시 월드컵을 앞두고 쏟아진 다양한 합작 이벤트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씻고 이듬해 아사히 신문이 주는 아사히 예술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3일 개막한 공연은 한ㆍ일 우정의 해를 맞아 다시 마련한 앙코르 무대였다. 29일까지 신국립극장에서 15회 공연을 갖고, 다음달 4일부터 19일까지 시가, 도야마, 기타큐슈, 고베 등 일본 5개 도시 순회 공연에 나선다. 개막날 400여 석의 신국립극장 소극장은 빈 자리를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첫 공연이었기 때문인지 연극 관계자, 초청된 귀빈 관객도 많았다.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만개한 벚꽃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꽃잎을 흩뿌리며 서 있는 어여쁜 무대. 연극의 배경은 5월 어느 화창한 봄 날, 여의도 윤중로 근처의 한강 둔치다. 이곳에 서울의 한 어학당에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일본인들이 한국인 선생을 따라 소풍을 오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한국인 선생은 노모와 동생 내외도 데리고 나와 학생들에게 소개시킨다. 2시간 30분의 다소 긴 상연 시간 동안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특별한 사건은 없다. 돗자리를 깔고 둔치에 앉아 한가득 준비해 온 도시락을 나눠 먹고 술잔을 주고 받으며 한국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 그러나 이들이 주고 받는 평범한 대화 속엔 경제침체, 가족 해체, 고령화, 저출산, 세대간 갈등, 정체성 혼란, 한국의 폭탄주 문화, 군대, 지나친 사교육, 학원 폭력, 반일감정 등 현재 두 나라가 처한 사회적 단면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등장 인물도 이러한 사회적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어학당 학생 중에는 일제 통치 시절 잠시 한국에 살았던 60대 주부가 있는가 하면, 윗 세대와는 달리 한국을 무척 좋아하는 젊은이, 한국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는 샐러리맨, 세계 여행 중인 프리터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재일교포도 있다. 어학당의 한국인 선생은 장남이면서 늦게까지 장가를 가지 못해 노모의 속을 태우고, 선생의 동생 부부는 숨막히는 한국 생활을 접고 캐나다로 이민가기로 결심한 상태다. 연극은 2시간 30분 동안 세트의 전환도, 줄거리상 특별한 사건도 없이 이들이 주고 받는 '조용한' 대사만으로 이어지지만,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동시에 묘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 배우들의 호연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60대 주부 역의 미타 가즈요, 선생 노모 역의 백성희 두 여배우는 이 작품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미타 가즈요 씨는 '일본의 박정자' 정도로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유명한 배우. 원로 배우 백성희 씨는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고령(80세) 때문에 몸이 편치 않은 상황에서도 단아한 자태로 뛰어난 연기를 펼쳐 이날 관객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연극이 바람직한 합작 공연의 본보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극작 단계에서부터 양쪽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아이디어를 내 시작했기 때문이다. 극작에는 국내에서 평론가 겸 작가로 활동 중인 김명화 씨와 일본의 극사실주의 작가로 유명한 히라타 오리자 씨가 함께 참여했다. 연출 역시 히라타 오리자, 이병훈 두 사람이 맡았다. 실제 20년 전 한국에 와 어학당에 다녔다는 히라타 씨는 "한국과 일본이 지리적으로 이웃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며 "때문에 서로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싫어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우리측 연출인 이씨는 "일본은 방황, 우리는 탈출이라는 두 모티브로 출발해 아이덴티티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며 "과연 우리가 미래에도 이래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공연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만했던 것은 바로 관객의 반응이었다. 재공연인 까닭도 있겠지만, 2002년 공연에 비해 관객의 반응이 훨씬 자연스러워진 것. 히라타 씨는 "2002 월드컵, 한류 붐 등 덕분에 불과 2-3년 새 일본 내에서 한국이 굉장히 많이 알려졌다"며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그만큼 쉬워졌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작품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더 친근하게 느끼게 된 것은 관객만이 아니었다. 배우와 스태프 역시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이해시키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일례로 극중 어학당 선생의 동생 역을 맡은 배우 서현철 씨가 어머니인 백성희 씨의 무릎에 눕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엔 일본 배우들이 이를 보고 너무 놀라더라는 것. 일본에선 자칫 '근친상간'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서현철 씨는 "한국의 가족 문화 등을 설명하면서 배우들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며 "작품을 통해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어학당 선생 역을 맡은 이남희 씨는 "일본인들은 웬만해선 집에 잘 초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린 일본 배우들 집에 놀러가기도 할 만큼 가까워졌다"며 웃었다. 연출가 이씨는 "2002년 공연 땐 양국 배우의 차이가 금방 나타났지만 이젠 말 안하면 한국 배우인지, 일본 배우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가 됐다. 이게 진정한 교류가 아닐까 한다"며 의미있는 평가를 내렸다. 이 연극은 7월 1-3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일본에 비해 공연횟수(4회)가 적은 것이 아쉽긴 하지만 최근의 냉랭한 분위기를 문화의 힘으로 녹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쿄=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y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