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서울시내 한 특급호텔 객실.약속시간 20분 전에 도착한 A씨는 대낮인데도 창문 커튼을 완전히 닫은채 어둠 속에 앉아있었다. 손에선 진 땀이 나는 지 손수건을 쥔채 밖의 인기척을 살폈다. 오후 3시 중년의 신사 한 사람이 통역을 대동한 채 방안으로 들어섰다. 두 달 전 중국에서 안면을 익혀둔 이 신사는 대만 LCD업체인 C사의 총경리(CFO.재무최고책임자)였다. 총경리가 거두절미하고 제안을 해왔다. "저희 회사로 오시면 50평형대 아파트와 계약기간 5년에 매년 2억원의 연봉을 드리겠습니다." A씨는 국내 유수 TFT-LCD(초박막 액정표시장치) 제조업체의 핵심 연구직원.대만의 C사는 그가 6세대 컬러필터 기술을 빼오는 조건으로 억대 연봉과 아파트를 제시한 것이다. 6세대 컬러필터는 4세대 컬러필터에 비해 4.5배 이상 크기 때문에 정밀도와 균일도 등에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며 수 조원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유혹에 굴복한 A씨는 11월초 기술자료를 하드디스크드라이버(HDD)에 담아 대만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회사에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표를 냈다. 하지만 A씨는 정작 자신이 국가정보원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국정원은 모처로부터 첩보를 입수한 뒤 결정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 A씨를 24시간 감시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검거됐고 그동안 빼돌린 기술자료는 현장에서 모두 압수당했다. A씨가 다녔던 회사의 관계자는 "만약 6세대 컬러필터 기술이 넘어갔더라면 경쟁업체와 최대 4년까지 벌려 놓은 기술격차가 1년 이내로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한경쟁시대에 후발 기업이 앞선 기업을 따라잡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첨단기술 확보다. 일급 연구인력과 엄청난 비용을 투입해 개발한 경쟁업체의 핵심기술을 산업스파이를 통해 손쉽게 빼낼 수 있다면 그것만큼 '효율적인 경영'도 없을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산업스파이 적발건수가 두드러지게 증가한 배경에는 첨단기술 확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경쟁 환경이 자리잡고 있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핵심기술은 돈을 줘도 살 수 없고 기술을 살 수 있는 화폐는 오로지 기술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밀을 유출당한 기업은 거의 기둥뿌리가 뽑혀나갈 정도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경쟁전략 자체를 바꿔야 할 뿐만 아니라 낮은 생산비를 앞세운 후발국 경쟁업체들에 멀찌감치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세계 처음으로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비 기술을 개발한 바이오벤처업체 P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4월 기술임원 K씨가 관련기술을 중국으로 유출하면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중국업체가 이 기술을 발판으로 별도 회사를 설립해 현지에 특허까지 출원했기 때문이다. 국내 기술을 빼내기 위한 해외기업들의 수법 또한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기술을 직접적으로 빼내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엔 합작법인 설립이나 연구소 설립 등을 통해 핵심인력들에게 은밀한 손길을 건네기도 한다. 지난해 4월 적발된 국내 의료기기 제조업체 L사의 전직 직원들이 전형적인 케이스다. 독일에 본사를 둔 S사는 지난 2002년8월 국내에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L사의 인력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거액의 연봉이 제시된 이면에는 별도의 조건이 붙어있었다. L사의 주력제품인 초음파진단기의 제조·판매에 관한 핵심자료를 가져오라는 것.관련 자료를 CD와 USB메모리에 무단 복사해 직장을 옮긴 이들은 당국에 적발되기 전까지 무려 1년6개월동안 L사의 정보를 이용해 영업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국정원 관계자는 "평생직장 의식 퇴조에 따른 전직의 일상화,한탕주의로 흐르고 있는 일부 엔지니어들의 모럴 해저드 등이 기밀 유출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따로 있다"며 "어렵사리 개발한 핵심기술을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는 기업들의 보안 불감증이 산업스파이들을 활개치게 만드는 배경"이라고 꼬집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