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래 < 한국외대 교수ㆍ과학사 > 처음부터 어려울 것으로 생각은 했다. 우리말 모르는 외국인 총장이 한국 대학을 이끈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까? 그래도 혹시나 기다렸더니 지난 달에는 엉뚱한 소리가 보도되면서 큰 혼란이 일어났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사립화하고 종합대학을 만들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12월14일의 '러플린 구상'은 사립화에,7천명의 대학을 2만명의 규모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영어를 원체 모르는 한국 기자들이 오해를 했었던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러플린 총장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A4 용지 한 장에 5가지 핵심 문제에 대해 영어로 쓴 내용이라니, 이번에는 기자들이 잘못 들을 것도 없을 듯하다. 그 용지를 받아, 돌아가 다시 확인했을 것이니,오해가 없을 듯하다. 그는 사립화 이야기는 원래 없었고, 돈을 더 구하려는 노력이 그렇게 오해된 듯하다고 했다. 또 모델로 삼을 대학은 미국의 MIT가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진정 경쟁력 있는 대학을 만들기 위해서" 의대와 법대 예비과정의 필요성은 강조했다. 학부를 따로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의대나 법대 진학 학생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또 학생들을 언어와 비즈니스 등 경제문제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결코 카이스트의 엔지니어 기능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상시키는 것이라는 의견이다. 대단한 충격일 듯하던 '러플린 사태'는 이렇게 일단 용두사미가 됐다. 3월에 구체적인 개혁안이 발표된다니,그때를 기다릴 수밖에….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원래 알려진 그의 구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훌륭한 과학자와 기술자는 종합대학 체제 속에서 교육받는 편이 더 낫다고 나는 믿는다. 문제는 똑같은 종합대학을 만들고 보면, 그 대학만 특별히 지원해 줄 명분이 어디에도 없다. 한국말 못하는 총장이 있다 하여 그 대학만 특별 지원한다면, 한국에는 모두 벙어리 총장만 등장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번 종합대학을 만들고 보면 우리 사회를 좀먹는 평등주의가 이 학교를 망치고 말 수밖에 없을 듯하여 걱정이다. 또 한 가지,나는 영재교육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야 열심히 시도해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국가 차원에서 영재교육을 장려한다는 건 잘못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과학발전을 위해 영재교육도 포기하기는 어려울 성싶다. 당근 없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 망아지가 이 땅의 이공계 지망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이 마당에 영재교육을 포기할 것이며, 특수 이공계 대학을 버릴 수 있을까? 내 생각으로도 그의 뜻이 절대로 옳기는 하지만, 세상이 옳은 방향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병적 현상의 근본은 한국이 여전히 양반사회의 정신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양반사회란 문과 중심의 사회이지 이과 중심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시대가 지난 지 1백년이건만 우리는 여전히 양반정신에 투철한 것이다. 몇 년 전 일본 규슈대학에 가서 그 대학교 역사를 읽다가 이런 대목을 보았다. 1930년대 조선 학생들은 법과를 공부해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관리가 되는 것이 모든 학생의 꿈이라는 것이다. 당시 일본인 교수들이 이를 기이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기록이 남은 것이다. 바로 그 기이한 현상이 지금도 여전히 넘쳐나는 한국사회다. 한번 생각해 보라! 한국 역사상 이공계 출신이 몇이나 장·차관을 포함한 고위관리가 됐는지? 역대,그리고 현재의 통계를 내보면 당장 드러날 일이다. 그리고 이 나라 고위관리의 힘은 왜 그리도 막강한가! 양반사회의 의식이 그대로인 채, 대학만 일반대학으로 만들어서 문제가 해결될 형편이 아니다. 러플린은 3월 발표에서는 사립대로 만든다거나,법대·의대 예비반 따위 말은 안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