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경제개혁논쟁이 뜨겁다.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경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대통령은 목소리를 높였고,개혁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경제위기론이 개혁을 저지하기 위한 반대세력의 음모라고 주장한다. 소비 위축,저축 감소,투자 저하,대규모 실업의 장기화.모든 계기판이 경기침체를 가리키건만 유독 집권세력과 여당의 현실인식은 도대체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괴리되어 있다. 도대체 무슨 경제개혁을 하려는데 눈앞의 현실을 애써 축소하려는가. 한국 경제가 다시 성장의 궤도에 진입하려면 노동과 자본을 증대시키기만 하던 과거 성장모델에서 탈피하여 기술혁신을 촉진하고,시장의 효율성을 높이고,제도와 관행을 선진화해야 한다고 다들 알고 있다. 진입 장벽과 퇴출장벽을 없애고 부가가치가 높은 곳에 보다 많은 자원이 배분되도록 시장의 경직성을 제거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나 새로운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창업을 가로막는 행정편의적 규제가 사라지고 경제를 더욱 개방화해 경쟁이 촉진되면,시장은 승자와 패자를 가름하고 합당한 상벌을 내린다. 제도적 경직성 때문에 더 많은 몫을 챙기던 집단에 이젠 그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책임 있는 정부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 초 금쪽같은 일년을 회의만 하면서 그려낸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이른바 '시장개혁 로드맵'에서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 경제개혁에 대한 본질은 등한시되고,시장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며,정부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인식도 턱없이 모자란 그 지도에는 오로지 재벌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만 그려져 있다. 개정안의 핵심인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축소는 국내기업에 대한 외국투자자의 적대적 M&A를 더욱 손쉽게 만들어 주겠다는 발상이다. 주주가치를 극대화시키지 못하는 경영진을 교체시킬 수 있는 적대적 M&A는 분명 자본주의의 '멋진 세상'이지만,왜 유독 미국 영국 등 극소수 국가에서만 적대적 M&A가 활성화되어 있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M&A가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이유는 대대적인 해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이나 일본에서 적대적 M&A가 금기시되는 것은 안정적 고용이 더 중요한 정책목표라는 것에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약자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더 힘을 실어주겠다는 참여정부의 노동정책과 적대적 M&A를 활성화하기 위한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축소는 모순된 정책이다. 진정으로 적대적 M&A를 활성화시켜 제대로 된 영미식 자본주의를 해보고자 한다면 현재의 노동정책을 1백80도 선회해야 한다. 수년째 논란 중인 출자총액제는 그 대표적인 예다. 디지털 경제에서 출자와 투자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투자기법은 갈수록 다양해지는 상황에서,출자총액제는 기업의 글로벌 생존경쟁을 가로막는 족쇄일 뿐이다. 기업의 투명성이 문제가 된다면 집단소송제 같은 장치가 있지 않은가. 출자총액규제 덕분에 지극히 적은 외국자본만 동원하더라도 거대 국내기업의 경영권이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음은 지난해 SK사례에서 입증된 바 있다. 정치권력은 유한하지만,경제는 지속된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공유되어야만 그 개혁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사회 곳곳의 경직성을 제거하여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는 진정한 개혁은 없고 세력간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집권세력은 개혁이라고 한다. 명분은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지만,인간의 역사는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 정치구호인지 웅변하고 있다. 경제는 역동성을 잃고 침몰해갈 뿐이다. "중국은 이미 한국을 추월해 버렸고 인도가 무섭게 따라오고 있는데,한국이 지금처럼 지리멸렬하면 추월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한 전문가의 진단이 환청처럼 귓전을 맴돈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byc@ehwa.ac.kr